아들 셋을 모두 북에 보낸 후, 하루 일과가 북에 물건을 보내는 일이 되어 버린 재일동포 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조총련 간부로 평생을 바쳤다. 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세 아들을 북에 보낸 후 모든 일을 접고 남편을 뒷바라지 해왔다. 그러한 부모를 둔 재일동포 영화감독 양영희는 지난 15년 동안 평양을 10차례 방문, 온갖 검열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 왔다. 그를 어제 인터뷰했다. 북에 친척이 있는 재일동포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양영희 감독은 인터뷰 시작부터 눈물을 글썽이더니 북에 있는 세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흘렸다. 일본에서 태어나 사춘기를 일본에서 보내고 음악과 철학과 건축을 사랑했던 오빠들이라고 한다. 부모의 권유로 10대에 모두 북송선을 타고 '귀국'했다. 북한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어느 오빠는 상처한 뒤 재혼하고 살아온 과정은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음악을 사랑했던 큰 오빠는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다 몇 해 전에 사망했다. 뇌경색을 앓던 아버지도 아들의 사망 후 넉 달 만에 이승을 버렸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사는 이 여성을 만나면서, 나는 나이 마흔에도 이산의 아픔을 갖고 있는 인간이 지구상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너무 멀리 있는 금단의 도시 평양이 그녀의 작품 속에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다시 다가 왔다. 다큐멘터리 속 양 감독의 조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에 신나고, 어른들 앞에서 수줍게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 손을 잡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매스게임을 기가 막히게 하는 도시, 늘 김일성 동상에 둘러 쌓인 전체주의 도시, 평양의 뒷골목에 자리한 소소한 삶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북송 재일동포가 9만 명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 양 감독의 오빠 셋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오랫동안 다큐를 만들고서도 발표하지 못한 데는 북에 있는 가족을 염려하는 마음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발표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작품을 이제 두 번째 세상에 내놓고 있다.
그녀는 북송 동포의 역사는 자신에게 '풍화될 수 없는 역사'라고 강조했다. 사상도 이념도 완전히 다르지만, 평생 무언가를 위해 물음표 없이 헌신한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네 아비들과 몹시 닮아 보였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굿바이 평양> 을 보는 일은 한반도의 역사적 상흔을 마주 보는 일이었다. 이제는 분단이니 통일이니 하는 사실들에 시들해 하며 멀어지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고 있는 일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진심으로 양영희 감독에게 힘이 되고 싶어졌다. 작은 극장에서 몇 안 되는 관객이 보더라도 누군가는 <굿바이 평양> 에서 이념을 넘은 가족의 사랑, 치유의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굿바이> 굿바이>
최근 영화계에는 양 감독의 다큐 외에도 <피와 뼈> <두만강> <우리학교> 같은 재일동포들의 작품이 늘고 있다. 모두 조총련계 부모와 조선학교 속에서 사춘기를 보낸 이들의 작품이다. 경계선에 서 있는 이들은 어쩌면 어느 사회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기에 한국과 일본 두 사회를 가장 적확히 보는 이들이 아닌가 싶다. 우리학교> 두만강> 피와>
그리하여 어제는 내게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는 이 땅의 허리 잘린 역사가 자본주의의 아스팔트 밑에 질퍽하게 배어 있는 날이었다. 이날의 감정을 부디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