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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칼럼] '황새 결송'과 소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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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칼럼] '황새 결송'과 소비자

입력
2011.02.1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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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 결송(決訟)'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다. 조선 후기의 민담집 <삼설기(三說記)> 에 실린 이야기다. 경상도에 어느 착실한 부자가 있었다. 이 부자는 무뢰배인 친척에게 무고하게 피해를 당하다가 그를 관에 고발한다. 그러나 무뢰배 친척은 평생 성실히 재산을 모으는 것밖에는 몰랐던 부자와는 달리 세상의 이치에 밝았다. 시정의 잡배답게 뇌물을 풀고 연줄도 샀다. 결국 부자는 송사에도 지고 재산도 뺏기게 된다는 얘기다.

부도덕한 사회 관행에 도전

이 이야기의 제목이 '황새 결송'인 이유는 부당히 송사에 진 부자가 황새와 따오기의 우화를 들어 형조의 판관들을 꾸짖었기 때문이다. 삼설기는 몰라도 그 이야기는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 울음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판결을 내려달라고 따오기가 황새에게 뇌물을 쓴 이야기다. 따오기의 뇌물은 황새가 제일 좋아하는 물고기 한 마리였다. 황새가 새 중에서 얼마나 높은 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 봤자 한낱 새이니 청렴한 마음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겠다. 황새는 물고기 한 마리를 얻어먹고 뻐꾸기보다 꾀꼬리보다도 더 따오기의 울음소리가 아름답다고 손을 들어주었다.

어린 시절에 읽은 우화가 과연 내게 어떤 교훈을 주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뇌물같은 걸 쓰는 건 나쁜 짓이라는 걸 알려 주었을까. 아니면 세상은 다 그런 거라는 씁쓸한 이치를 알려 주었을까. 아무리 위대한 가르침이 있더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건 세상이 가르쳐주는 만큼이다. 부도덕하거나 부패한 사회는 부도덕과 부패를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그에 승복하는 자세를 가르치기도 한다. 뭔가 좀 억울해도 참고, 뭔가 좀 그릇된 것 같아도 스스로 눈을 감고, 그러면서 단지 그게 내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위로하게도 되는 것이다.

과장된 기억일지는 모르나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에 권력 아닌 게 없었다. 동사무소창구 직원조차 권력이었다. 기다리라는 만큼 기다리고, 모든 불친절을 다 감내하고, 그러면서도 고개를 숙여야 할 때도 있었다. 내 돈 내고 서류 한 장 떼는 게 내 잘못이 아닌데, 뭐가 좀 이상하다 여기긴 했지만 세상이 다 그러려니 했다. 서른 살 무렵에 동사무소 화장실에 비치된 화장지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동사무소가 이렇게 친절해졌구나 놀랐던 것이다.

그야말로 오래된 얘기이겠다. 지금은 전화 한 통만 걸어도 안내원이 '고객님,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세상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넙죽 들으니 매번 기분이 좀 야릇하기는 한데, 그 정도로 친절하고 봉사하겠다는 뜻을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는 또 이렇게 살아야 할 일이다.

휴대폰 수리비 25만원 가량을 보상받기 위해 걸었던 소송에서 소비자가 승소를 했다는 기사를 봤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다윗이 이겼다는 류의 제목들이 보인다. 그런데 이 골리앗, 다윗에게 슬쩍슬쩍 뇌물을 쓸 용의를 비치기도 했던 모양이다. 조선 후기 '황새의 결송'이 오늘날에는 이렇게 달라졌다. 고객이, 소비자가 권력이 될 수도 있는 세상인 것이다.

불의에 경종 울린 용기

그래 봤자 그 권력이란 게 얼마나 대단할까. 고작 25만 원짜리 권력이 아닌가. 25만원이 1,000 또는 1,000만 명 합쳐지면 그 숫자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를 말하기 전에 나를 감동시킨 건 '이것은 못 참겠다'라고 생각한 그 소비자의 마음이다. 못 참을 일 많은 건 그 사람뿐이 아니겠으되, 그 못 참는 것 바로 잡겠다고 시간 쓰고 돈 쓰고 하는 일을 참을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경종이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가 제 주먹으로 종을 치면, 종치는 저의 손만 아플지 모르나 종소리는 멀리 가겠다. 저 소리가 뭔가 하다가 나도 한번 쳐볼까 생각하기도 하겠다. 어디 휴대폰 수리비 정도이겠는가.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종소리겠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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