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주에 갇히기 직전 사도세자에게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잘 가요”라며 피눈물의 작별을 고한다. 사도세자는 “당신은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이라며 언어의 비수를 꽂는다. 그 처절한 기억을 안고 피눈물로 을 적어 내려 갔을 혜경궁의 고통이 객석을 짓누른다. 극단 인혁의 ‘한중록’ 은 이 지점에 천착한다. 하지만 더 큰 매력은 따로 있다. 바로 현대성이다.
권력 쟁투, 외척과 부왕 간 갈등의 제물이 돼야 했던 사도세자. 극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펼친 7일간의 행적과 그 앞에 서막을 여는 대목(제1일)까지 모두 여드레를 다룬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간섭하고 맞물려 들어가는 모습이 클레오파트라에서 마오쩌둥(毛澤東)까지 역사적 인물들을 현재의 무대에 불러내 서로 충돌시키는 막스 프리쉬의 ‘만리장성’을 닮았다. 또 무대 상황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객석에 제공하는 배우의 존재는 서사극을 연상케 한다.
분명 과거의 실체적 사건이지만 무대는 극히 현대적 사물들로 채워져 있다. 비디오 테이프, 코카콜라, 말라 틀어진 피자 등은 가혹한 운명의 구조물에 얽혀 든 사도세자의 정황을 상징하기 족하다. VTR 화면에 가득 투영되는 영상은 이 연극이 기록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현대의 관객에게 직접 발언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인파가 오열하는 박정희와 김일성 장례식의 몽타주 영상도 이런 장치다.
가혹한 운명에 포위돼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린 청년인 사도세자가 무대에서 보여 주는 말초적 쾌락과 냉소의 제스처 역시 극히 현대적이다. 사도세자가 친구나 공주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햄릿’에서 불의한 세상에 잔뜩 꼬인 햄릿이 친구(호레이쇼)나 공주(오필리어)에게 퍼붓는 말을 연상시킨다.
무대에서 끝까지 있는 것은 혜경궁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 무대를 또 다른 가능성으로 열어 둔다. “난 배우가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사도세자)은 진실을 말한다고 하니 이 끝을 지켜보게 하여 훗날을 두고 보죠.”
출연 배우들이 들려주는 정가를 비롯해 이 무대를 위해 만들어진 해금 음악 등 청각적 장치로 무대는 더욱 풍성하다. 백하룡 작, 이기도 연출. 18일~3월 13일 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 (02)923_7888
장병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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