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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칭기즈칸이라 불린 화가, 한 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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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칭기즈칸이라 불린 화가, 한 묵

입력
2011.02.1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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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세 재불 화가 한묵 선생님은 화단 최고령이시다.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작가들이 모일 때 선생님은 젊은 시절 자주 가셨던 이북의 해금강을 회상하며 지은 시 를 가끔 낭송하셨다.

"바다는 젊은이의 가슴인가 그 숨결은 드높아 억세게 일어 끌었다가는 왈칵 달겨드는 드세움으로 암벽을 물어뜯을 뻔 하다가는 바락 쓰러지고 마는 안타까움이여, 아 그것은 천 길을 솟구치는 바람을 안고서 다하지 못하는 괴로움이야. 그러나 바다는 항시 푸르러 항시 부풀어 한결같이 고함쳐 달겨든다."

90대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넘치는 목소리가 레스토랑에 카랑카랑 울린다. 홀연히 일어서 시를 낭송하는 한 동양 노인 때문에 어리둥절 식사를 하던 파리지앵들은 이윽고 박수로 화답한다. 한국어로 낭송한 시였지만 노 화백에게는 초면의 프랑스인들조차 감동시키는 인간적 크기와 위엄이 있다.

생각이 크고 올곧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대인 한묵 화백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초인과 같은 면모를 지니고 계신다. 10여 년 전 파리에서 심장 수술을 받으실 때였다. 수술 직후에는 목이 잠겨 환자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을 모르는 한묵 선생님은 마취에서 깨어나자 주치의에게 어렵게 말씀하셨다. "나는 바다에 가면 시를 읊고 산에 가면 노래를 부르는데 이제 말하기가 어렵다. 시도 노래도 할 수 없으니 나는 죽은 것과 같다." 사지를 넘나드는 순간에도 한묵 선생님은 예술만 생각하신 것이다. 예술을 향한 불굴의 정신을 가진 백발의 노인에게 감동한 프랑스인 의사는 선생님을 칭기즈칸이라고 불렀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병원에 퍼졌다.

한국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거목으로 평가 받고 있는 한묵 화백은 살아 있는 근ㆍ현대 미술사다. 일본에서 수학한 뒤 6ㆍ25 때는 금강산에 머물다 1ㆍ4후퇴 때 돌아와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셨다.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던 1961년 48세의 나이에 안정된 삶을 박차고 예술의 이상을 찾아 파리로 떠났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겠다"시며 파리까지 쌍발기를 타고 3일이 걸려 도착하셨다.

화가 이중섭(1916~1956)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선생님이 금강산 온정리에서 그림 그릴 때 원산에 머물던 이중섭 화백이 자주 찾아 왔다. 가난했던 이중섭 화백을 선생님은 자신의 방에서 함께 기거하게 하고 삽화 일을 맡아 생긴 조그만 수입으로 끼니를 해결해 주시기도 했다. 거식증에 걸린 이중섭 화백이 행불자로 사망했을 때 선생님은 그 시신을 화장하여 반은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보내고 반은 망우리에 묻어 비석을 세웠다. 훗날 이중섭 화백이 유명해지자 친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정작 한묵 선생님은 그를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미안함 때문에 인연을 취재하려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지 않으셨다.

지난해 초가을, 공원으로 아침 운동을 나가셨던 선생님이 돌아오시지 않았다. 기억이 흐려져 집을 찾지 못하시다가 지인의 눈에 띄어 이틀 만에 돌아오실 수 있었다. 이제 선생님은 예전처럼 를 암송하시지 못한다.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파리 작업실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의 뛰노는 어린이들을 내려다보며 가끔 미소를 지으신다.

"이제 예술은 돈을 따를 뿐이다"는 어느 영국 작가의 말은 공공연한 진리가 되었다. 90이 넘은 연세에도 "내 삶의 추진력이었던 전위정신은 마르지 않았다"고 하신 한묵 선생님의 삶과 정신은 예술이 물질적 가치로만 평가되는 이 시대에 등대처럼 빛을 발한다. 예술가는 많아도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 한묵 선생님은 우리 시대 거인이자 큰 스승이시다.

전강옥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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