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공천 넘어 인연·정책 서클로 '계보의 진화'
“여당에 계보나 계파는 없다. 여당은 하나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9월 박희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회동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의 단합을 촉구하는 일종의 독려성 발언이었다. 물론 현실은 반대다. 계파는 현실 정치에 엄존하고 있고, 여전히 정치판을 움직이는 주요 변수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구동 방식이 과거와 달라졌을 뿐이다.
3김 시대로 일컬어지는 과거 정치는 ‘계보의, 계보에 의한, 계보를 위한’정치였다. 자리와 정치자금, 공천이 계파를 통해 분배됐다. 양과 질에서 차이가 있을 뿐 분배 방식은 여야가 다르지 않았다.
1992년 14대 총선 때 민자당의 총선후보 공천에 관여했던 A씨의 얘기다.“민정계, 민주계, 공화계 등 세 계파 대표들이 평창동 O호텔에 모여 공천을 했다. 제각각 명단을 들고 와 협상을 거쳐 최종 명단을 확정했다.”
계파 보스의 공천권은 공공연히 인정됐다. 공천을 받으려면 보스에게 줄을 서야 했다. 지역할거주의가 뒤를 받친 3김의 공천은 거의 당선으로 연결됐다.
공천이 계보의 엔진이라면 기름은‘돈’이었다. 여당 인사 B씨는“1992년 총선 당시 일부 계보는 소속 후보들에게 1억~2억원까지 내려 보냈다”며 “전체 규모는 지금 수준에서도 깜짝 놀랄 액수”라고 말했다. 계보 의원들을 로열티(충성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눠 돈을 차등 지급했던 거물 정치인의 얘기는 유명하다. 명절을 맞거나 중요한 정치적 행사가 있을 때는 두툼한 봉투가 또 내려갔다. 정치권 인사 C씨는 “1990년대 계보 중간보스가 명절 한철 보내는 데 대략 2억원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정도 돈을 만들 수 있어야 보스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의원들은 돈 때문에 줄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돈으로 계보를 굴리던 시대는 끝났다. 김영삼정부-김대중정부-노무현정부를 거치면서 ‘돈 정치 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퇴조했다. 선거법 강화, 금융실명제 도입, 외환위기, 3김정치 시대 마감 등이 이런 현상을 촉진시켰다. “지금은 계보 의원이 보스를 위해 돈을 쓸지언정 보스가 계보 의원에게 돈을 내려 보내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 여권인사는 말했다.
지금의 계보는 어떻게 굴러가는 걸까.
2006년1월.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된 이재오 의원이 여성 원내대변인감을 찾아 나섰다. 여러 의원들이 물망에 올랐다. 당시 초선 진수희 의원은 ‘원내대변인 하마평이 나온다’는 기자의 얘기에 이렇게 대꾸했다. “차 한번 같이 마셔본 적 없는 나를 시켜주겠어?”
차 한 번 마셔본 적 없던 두 사람은 원내대표와 대변인으로 인연을 맺어 지금 계보 보스와 그 오른팔로 둘 도 없는 사이가 됐다. 현재 보건복지부장관을 맡고 있는 진 의원은 “내가 이 장관 계보라면 순전히 인간적 정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직 등으로 연을 맺어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가는 게 요즘 계보다. 친박계 의원 상당수는 박근혜 전 대표의 대표 시절 당직을 맡아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민주당의 손학규ㆍ정동영ㆍ 정세균계 역시 각각 당 대표 시절의 당직자들을 주축으로 한다.
물론 학연∙지연도 작용한다. 민주당 정동영계의 핵심인 최규식 의원은 전주고 선후배 인연이, 손학규 계의 핵심 김부겸 의원은 서울대 정치학과 운동권 선후배 인연이 이어진 경우다. 이념적 동질감으로 뭉쳐진, 민주당 486그룹 등도 있다. 하지만 보스 중심 계보라기 보다 정책 기조를 함께하는 사람들의 블록으로 봐야 한다. 돈과 공천을 매개로 똘똘 뭉친 ‘식구’ 같던 계보가 몇 가닥 인연이 얽힌 ‘서클’로 변모한 것이다.
하지만 계보를 유지하는 근원적 힘은 예나 지금이나‘금배지를 달아줄 수 있는 보스의 능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사실상의 공천권이 계보의 주요 동력이란 뜻이다. 2008년 18대 총선 공천 당시 여당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 중진 의원 집으로 늦은 밤 한 공천희망자가 찾아 왔다. 그는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었다. “앞으로 보스로 모시겠습니다.” 초선의원이 된 그는 지금도 그 중진 의원의 계보로 분류된다.
물론 강도는 많이 약해졌다. 정치권 인사 D씨는 “보스나 계보원이나 서로 해 줄 수 있는 게 많이 줄었다. 보스의 장악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눈 먼 돈이 사라진데다 더 이상 공천이 곧 당선을 보장하는 풍토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보ㆍ계파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최근엔 되려 계파 갈등이 심해졌다는 진단도 있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씨는 이렇게 말했다. “계파는 생겨나기 마련이다. 다양한 노선이 경쟁하도록 해주고, 민의를 수렴하는 통로 역할도 하는 등 순기능도 한다. 없애려 하기 보다 순기능을 살리고 역기능을 줄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 한나라, 친이계는 분화 중… 친박계는 결집 중
현재 한나라당 계파로는 친이명박계와 친박근혜계가 있다. 한나라당 의원 171명 가운데 범친이계는 90여명, 친박계는 50여명 정도 된다. 중립 성향은 30여명이다.
이같은 계파 구도는 2007년 대선후보 경선과 2008년 총선을 거치면서 형성됐다. 다만 친이계는 대선과 총선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소계파로 분화했다. 앞으로 2012년 총선과 대선이 가까워지면 계파 구도는 큰 변화를 겪게 될 전망이다.
범친이계 내부에는 친이직계, 친이재오 성향, 친이상득 성향, 친이 소장파 등 네 그룹 정도의 소계파가 있다. 친이직계는 조해진 김영우 강승규 의원 등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캠프 참모 출신 또는 비례대표 의원 등을 포함해 20여명이다. 친이재오 성향은 안경률 이군현 의원 등 최대 20여명 정도에 이른다. 친이상득 성향은 이병석 주호영 의원 등 영남권 친이계 의원들과 비례대표 의원 등 10여명 정도 된다. 정두언 정태근 의원 등 이상득 의원과 대립각을 세운 친이 소장파 의원들도 별도 그룹으로 분류된다.
앞으로는 친이계의 분화가 더 가속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미 친이계 중 차명진 임해규 의원 등 김문수 경기지사에 가까운 의원들과 진수희 권택기 의원 등 이재오 특임장관에 가까운 의원들이 구별되기 시작했다.
친박계의 규모는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만큼 계파 결속력도 갈수록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친박계 의원 50여명 가운데 적극적으로 계파 활동을 하는 의원은 20여명에 달한다. 홍사덕 서병수 허태열 이한구 유승민 김태환 유기준 이혜훈 한선교 이학재 이정현 윤상현 김선동 의원 등이 그들이다.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 민주, 빅3 중심 치열한 세력 경쟁
민주당에선 17대 총선, 2007년 대선, 18대 총선과 지난해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역학 관계에 따라 계파가 형성돼 있다. 현재의 계파 구도는 지난해 10ㆍ3 전당대회 이후 이른바 '민주당 빅3'(손학규 대표, 정동영∙정세균 최고위원) 중심으로 정립됐다. 빅3는 내년 총선후보 공천과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치열한 신경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당권파인 손학규계는 지난해 전대 이후 급부상했다. 수도권의 온건파 그룹과 2008년 18대 총선 당시 손 대표가 영입한 비례대표 의원들이 주축이다. 이 가운데 손 대표의 '복심'인 김부겸 의원을 비롯해 정장선, 우제창, 조정식 의원 등 수도권 온건파들은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 때도 손 대표를 적극 지지했었다.
정동영계는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던 정 최고위원이 영입한 의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정 최고위원의 대선 패배와 18대 총선 낙선으로 세력이 약화됐다. 2009년 4월 재보선으로 복귀한 정 최고위원은 최규식, 신건 의원과 비주류 의원 모임인 쇄신연대 소속 의원들과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외연 확대를 꾀하고 있다.
정세균계 의원들은 대부분 정 최고위원이 2008~2010년 당 대표 재임 시절 당직에 중용한 친노그룹ㆍ486세대 의원들이다. 문희상, 이미경, 박병석, 김진표, 김유정 의원 등도 정 최고위원의 측면 지원세력이다. 하지만 지난해 전대 이후 486세대 의원들이 독자세력화를 추진, 세력 분화를 겪고 있다.
구민주계는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참여한 옛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다. 이들은 18대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계와 통합, 합당을 추진했다.
김회경 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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