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초콜릿/ 캐럴 오프 지음·배현 옮김/ 알마 발행·416쪽·2만2000원
동양 문화에 대한 19세기 서양의 폭발적 관심과 옹호는 기실 제국주의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1978년 <오리엔탈리즘> 을 통해 갈파했다. 식민지 경영의 기획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당시의 유한계급이 후대에 자신들의 관심이 이렇게 해석될지 알았다면 아마 이렇게 항변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뭘? 우린 그냥 순수한 호기심인데.’ 오리엔탈리즘>
지난 세기 말부터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핍박받는 자의 고통에 대한 고발, 혹은 자기반성 성격의 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책은 파키스탄 어린이들이 열악한 공장에서 세계적 스포츠브랜드 운동화에 독성 접착제를 바르거나 카리브해 외딴 섬의 고산지대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토착민들이 자외선에 노출된 채 커피 밭을 가는 현실을 아프게 고발한다.
혜택받은 대륙에 사는 인민은 이런 책을 통해서나마 자신의 무의식적 소비가 혜택받지 못한 대륙 인민의 존엄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무척 올바른 책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런 잠깐의 각성이 현실의 변혁으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해서 이런 혐의를 거둬들이기 힘들다. 이런 책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은 폭력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갑의 위치에 있다는 도덕적 부채의식을 덜어 내기 위한 행위가 아닐까.
회유와 협박을 무릅쓰고 르포르타주를 쓴 저자나 그 작품을 읽고 공정무역 마크를 찾아 다니는 독자는 펄쩍 뛸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쏟아지는 착한 책과 착하지 못하게 돌아가는 세상 사이의 간극은 커져만 간다. 한두 세기쯤 지난 뒤 또 다른 에드워드 사이드가 나타나 이런 분석을 내놓는다고 상상하는 것은 지나친 망상일까. ‘초국적 자본의 시대에 제1세계 인민은 그들의 욕망이 빚은 2세계 인민의 참상과 관련한 심리적ㆍ미학적 불편함을 해소하는 보완재로 자성적 성격의 책을 생산ㆍ소비했다.’
<나쁜 초콜릿> 의 테마는 초콜릿이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 곳곳의 분쟁 현장을 취재한 경험이 있는 캐나다의 저널리스트가 초콜릿의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함 이면의 착취를 들여다본다. 저자는 서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농장을 돌며 부유한 소비자의 탐닉이 어떻게 폭력으로 변환돼 가난한 생산자에게 전가되는지를 보여 준다. ‘죽음을 부르는 초콜릿’ ‘일회용 인간들’ ‘도둑맞은 열매’ 등 소제목만 읽어 봐도 이 책의 방향과 색깔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나쁜>
15세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든든한 뒷배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가 초콜릿 중독자였다는 사실 등 초콜릿에 얽힌 풍부한 이야깃거리도 담겨 있다. 오랜 세월 초콜릿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매혹에 빠뜨렸는지, 세계 최대의 카카오 생산지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왜 내전이 끊이지 않는지 등도 알려 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느낄 정서적 자책이 실천적 형태의 반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해서 이 책도 불편하다. 이런 리뷰에 대해 아마도 대다수는 ‘내가 뭘? 난 진짜로 뜨끔하구먼’하고 반응할 듯하지만.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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