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일본의 화장품회사 시세이도사는 인도네시아의 자생식물인 자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각국에 특허출원을 신청했다. 특허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자무를 원료로 1,000년 이상 전통약제를 만들어온 인도네시아 농가들이 오히려 시세이도사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할 처지가 됐다. 이렇게 되자 인도네시아의 NGO들은 이를 ‘생물해적질’이라며 특허출원반대운동을 펼쳤고, 결국 시세이도사는 2002년 특허출원을 취소해야 했다. 생물자원 수출국과 생물자원 이용국 사이의 갈등은 화장품, 제약, 건강식품 등 원료의 50% 이상을 해외생물자원에 의존하는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채택된 ‘나고야 의정서’는 생물유전자원 이용으로 얻는 이익을 생물자원수출국과 이용국이 공유하도록 하는 국제협약. 내년 상반기로 예상되는 의정서 발효를 앞두고 정부와 산업계, 학계에 비상등이 켜졌다.
우리 생물자원 현황 파악도 부실
나고야 의정서가 발효되면 해외생물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우리나라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들은 우리생물자원 현황파악을 통한 생물주권 확보, 주요 생물자원수출국에 대한 사전 협력강화 등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 생물자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은 그 기초작업인데, 3만7,000여종의 목록을 작성한 국립생물자원관의 ‘국내자생동식물 목록’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보의 양이 부족하고 해양생물(국토해양부), 농업관련 종자(농림수산식품부), 미생물자원(교육과학기술부) 등 여러 부처들이 구축한 데이터베이스들과 정보공유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약업계에서는 신약개발을 위해 우리생물자원의 유전자정보를 검색하려면 해외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털어놓는다. 김기중 고려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우리 데이터베이스의 경우 생물의 사진, 분포지 정도의 간략한 정보로 꾸며져 있다”며 “구체적인 성분과 약리작용, 유전정보 등 한 생물종에 대한 모든 정보를 체계적으로 집적한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주로 남미, 동남아의 개도국들인 생물자원수출국들과의 협력도 걸음마 단계다. 현재까지 우리정부가 업무협약을 맺은 나라는 베트남(2009년), 캄보디아, 라오스(2010년), 미얀마(2011년) 정도다. 이병희 국립생물자원관 보건연구관은 “일본의 경우 정부와 기업이 협력해 1960년대부터 남미, 동남아 등 생물자원수출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왔다”며 “생물자원 수출로 이익을 거둘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 나라와 미리 인적교류, 기술지원 등의 협력을 맺어둬야 나고야 의정서 발효 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사실상 무대책… 정부차원 지원 시급
나고야 의정서 발효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는 제약, 화장품, 바이오업체들. 식약청에 등록된 화장품 원료 7,500여종 가운데 3,500여종이 해외자원이다. 그러나 “나고야 의정서 얘기는 처음 들어본다”는 업체가 상당수다. 지난해 5월 한국생명과학연구원이 국내 바이오업체 1,000여 곳을 대상으로 나고야 의정서 발효 시 대책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응답한 업체는 37곳에 불과했다.
나고야 의정서가 비준될 때 업계의 피해액수를 구체적으로 예측한 보고서 역시 전무하다. 지난해 나고야회의 당시 미국, 캐나다 등 관련업체들이 관계자들을 파견하고, 시들리오스틴 같은 유수의 로펌과 계약해 법률적 검토를 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손미원 동아제약 연구소 이사는 “1990년대 초부터 끌어온 논의라 나고야 의정서가 정말 체결될지에 대해 업계가 안이하게 생각한 측면도 있다”며 “의정서가 실제 발효될 때까지 2월과 6월에도 실무협상이 진행되므로 우리업체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산학연이 힘을 합쳐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호정 고려대 식품자원 경제학과 교수는 “20세기의 국제환경이슈였던 기후변화협약의 경우에도 논의 초기에 기업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요즘은 녹색산업이라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기회로 눈여겨보고 있다”며 “기업들은 나고야 의정서를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생물자원 이용에 관련된 신기술확보의 전환점으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올 상반기 나고야의정서 비준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용역을 실시한 뒤 하반기 비준과 관련된 법률안 정비에 나설 예정이다. 의정서는 생물다양성협약에 가입한 국가 중 50개국이 비준을 하면 발효된다. 현재 콜럼비아 등 4개국이 비준의 예비단계인 협약서 서명을 끝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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