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다녀온 적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당당합니다.”
9일 SBS 수목드라마 ‘싸인’ 촬영장에서 만난 박신양은 당당히 안방극장에 복귀한 소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는 2007년 ‘쩐의 전쟁’ 연장분 출연료를 과도하게 챙겼다는 이유로 드라마제작자협회로부터 무기한 출연 정지를 당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난 적이 없으니 복귀란 말도 적당치 않다”며 말했다. 늘 거침없었지만 그런 자신감의 바탕에는 김태희 송승헌 주연의 ‘마이 프린세스’(MBC)를 따돌리고 수목극 1위를 달리고 있는 ‘싸인’의 저력이 깔려있을 터.
‘싸인’의 성공은 박신양에게 의미가 깊다. 거대권력과 맞서 싸우는 소신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법의학자 윤지훈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그는 명품배우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그는 쉬는 동안 200여편의 대본과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드라마제작자협회 소속사의 대본이 “절반 정도였다”며 “재미있는 상황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출연 정지를 내린 협회 소속사들에서 러브콜을 보낼 정도로 박신양이란 배우의 존재감은 여전했던 것이다.
깐깐하게 고른 ‘싸인’은 그의 뚝심 있는 연기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그는 ‘싸인’에 대해 “특수한 얘기를 다루고 처음 시도하는 장르라서 좋았다”면서 “다른 드라마에서 못하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고, 생각했던 만큼 줏대 있는 작품”이라고 자평했다. 한국판 CSI라고 불리며 지상파 드라마에서 첫 시도하는 장르를 택한 선택도 옳았다.
부검의를 연기하기 위해 부검 현장을 직접 경험하는 등 성실하게 준비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부검 참관 경험 덕에) 어떤 대사와 상황이 와도 나는 법의학자고, 여기가 내 일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지훈처럼)무슨 궁지에 몰려도 뚫고 나갈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도 얻었다”고 말했다. 캐릭터를 철저히 연구해 법의학자의 시선으로 상황에 대처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특히 “할 이야기도 없는데 억지로 만들어가는 상황이 아니라서 좋다"며 작품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지만 이번 주에 윤지훈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 스승 정병도(송재호)의 죽음 등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 방영되니 기대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20부작으로 기획된 ‘싸인’은 9일 11회를 방송하면서 반환점을 돌아섰다. 앞서 얽힌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구조라 아직도 풀어낼 이야기가 많다.
‘싸인’을 기획하고 연출한 장항준 감독이 ‘외과의사 봉달희’의 김형식 PD에게 바통을 넘기고부인인 김은희 작가와 함께 대본 집필에 들어간 만큼 더 촘촘한 스토리가 기대된다. 장 감독은 10년 전부터 법의학자를 염두에 둔 작품을 구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신양은 “어제 오늘 1시간, 30분 이렇게 짬짬이 차에서 자면서 촬영해 졸려 죽겠다”고 말했지만 밝은 표정이었다. “드라마가 잘되고 있어서 너무 좋다”는 그는 “(반응이 좋아)현장의 스태프들이 활기차니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 국과수 김유훈 과장
법의학 드라마 ‘싸인’을 실제 법의학자들은 어떻게 볼까.
15년 경력의 베테랑 법의학자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유훈 과장은 한마디로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더라”고 했다. 민감한 사건을 많이 다루는 전문직종이 대개 그렇듯이, 현실세계의 극화 과정에 수반되는 얼마간의 부풀리기나 틈새가 못내 아쉽고 조금은 불편하다는 얘기다.
김 과정은 먼저 ‘권력’을 개입시킨 이야기 전개가 자칫 시청자들에게 법의학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고 경계했다. 그는 “드라마에 국과수가 권력의 요구에 의해 혹은 기관의 이익을 위해서 감정 결과를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며 “법의학자들이 양심을 걸고 하는 감정에 대해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 국민들이 (우리를) 믿겠냐”며 우려했다.
김 과장은 또 드라마 속 법의학자들이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해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려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법의학자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의학자가 한 가지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실제는 부검 소견 하나도 며칠씩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리죠.” 그는 특히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극 속에서 ‘천재 법의학자’로 포장되는 것에 우려를 드러냈다.
그러나 김 과장은 부검이나 혈흔 분석 등의 현실감 있는 표현에는 후한 점수를 줬다. 그는 “얼마 전 드라마에서 총기 사고 때 남겨진 혈흔을 갖고 총탄의 각도를 측정하는 장면을 봤는데, 자문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며 “부검도 하는 방법이나 순서가 실제와 일치했다”고 평가했다.
김 과장은 ‘싸인’이 앞으로 권력형 비리 등에 치우치기보다 미국 인기 드라마 ‘CSI’처럼 법의학의 본질인 과학수사에 보다 초점을 맞춰주기를 바랐다. “법의학 드라마라면 ‘CSI’처럼 사건 하나 하나를 과학적 방법으로 해결해나가는 걸 보여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싸인’은 비현실적인 권력간의 암투 등을 너무 부각하다 보니 과학수사가 무시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는 “국과수에는 법의학자뿐 아니라 약ㆍ독물을 검사하는 약사, 교통사고 차량에 대한 검사를 하는 공학 박사 등 다양한 분들이 있고, 어떤 사건은 모두가 협력해 해결한다”면서 “이런 협력과정이 좀 더 드라마에 담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현우 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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