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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박지성과 이영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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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박지성과 이영표를 위하여

입력
2011.02.09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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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6월. 기자 입장에선 심히 곤혹스러웠다. 월드컵사상 첫 1승이 내심의 기대였다. 첫 경기 폴란드전을 이겼을 때 다신 쓸 기회가 없으리란 생각에 모든 단어를 털어 넣었다. '이겼다, 해냈다, 감격, 새 역사, 환희, 만세, 장하다,…'그런데 웬걸, 4강까지 치달았다. 남은 표현이 없던 탓에 매번 머리를 싸맸다. 결국 반복과 변형이 됐다. '만세'는 '만만세'로, '새 역사'는 '역사의 새 장' 식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한 달은 2002년 6월이었다. 언제 우리가 정파, 이념, 지역, 처지를 다 잊고 그토록 크고 순수한 환희와 일체감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그 황홀한 기억의 중심에 박지성과 이영표가 있었다. 그들이 훌훌 떠난 지 여러 날이 됐어도 상실감이 쉬 가시지 않는 이유다.

스타의 새 전형을 창조해낸 그들

사실 우리 축구사의 스타 중 첫 손가락은 차범근이어야 마땅하다. 당시 세계 최고의 독일리그에서 활약하면서 '월드 올스타 11인' '20세기 축구영웅 100인'등에 선정됐던 그는 오웬, 발락, 피구, 마테우스, 말디니 등 기라성 같은 별들마저 흠모한 우상이었으며, 그의 팀과 맞붙어본 프리미어리그 감독 퍼거슨에겐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존재"라고 탄식케 한 전설이다.

2002년 방한한 슈뢰더 독일총리는 "양국 친선보다 차붐부터 만나고 싶다"고 했고, 저명한 독일시인은 그를 보내준 신과 코리아를 찬양하는 '차범근 찬가'까지 지었다던가. 아들 차두리에서도 보듯 그는 체격과 힘, 폭발적 스피드를 두루 갖춘 타고난 스트라이커였다. 워낙 독보적인 스타성으로 고교 때부터 다른 선수들은 존재감을 잃었다.

그러나 원한다고 아무나 차범근이 될 수는 없다. 천부적 조건과 재질이 바탕해야 가능한 꿈이다. 그러나 실망할 건 없다. 우리에겐 또한 박지성과 이영표가 있으므로. 그들은 전혀 다른 스타의 전형을 창조해냈다. 의지와 노력만으로 타고난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바꿀 수 있음을, 그게 지금의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통쾌하게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들은 남다를 것 없는 몸에 숭숭 여드름 자국과 금세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순박한 외모에서부터 스포츠스타의 통념을 깬다. 그렇게 평범하게 태어난 그들이 쉼 없이 내달릴 수 있는 '세 개의 폐'를 얻고 경이적인 무쇠체력을 갖기까지 얼마나 혹독한 자기단련 과정을 거쳤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박지성은 운동선수론 치명적인 평발에, 어릴 땐 감독이 강한 훈련을 꺼렸을 정도로 작고 약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도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들은 남들이 일찌감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뒤켠에서 묵묵히 자신과 싸워가며 한 발 한 발 진화해갔다. 온전히 스스로 만들어낸 스타라는 점에서 그들은 다른 어떤 천부적 스타들과 다르다.

두드러지려 하지 않고 다만 책임질 뿐인 경기모습도 그렇다. 오직 그만이 해결할 위치에 있지 않는 한 그들이 무리한 슛을 시도하는 장면은 별로 기억이 없다. 쉼 없이 헤집고 다니며 서서히 상대를 무너뜨리고 팀의 기회를 만드는 게 둘의 스타일이다. 이타적 플레이어란 표현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훨씬 뛰어난 재질을 타고난 숱한 스타 감들이 남의 수고를 받아먹는 일에나 재미 붙이거나, 경기장 안팎에서 쓸데없이 돋보이려다 스스로 명을 끊었다.

두고두고 기억될 아름다운 헌신

'너는 가장 빠르지도, 가장 크지도, 힘이 세지도 않고…하지만… 경기가 안 풀릴 때 우리에겐 지성이가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해.'(차두리의 트위터 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이 정도로 전폭적인 믿음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둘이 일관되게 보여준 성실성과 의지, 겸양과 희생은 대립과 반목, 이기와 적개심, 불신과 기만이 팽배한 이 팍팍한 현실에서 한 줄기 청량한 바람처럼 소중한 덕목들이다. 그들의 존재에 스포츠를 넘어 사회적 의미까지 부여하는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늦었지만 새삼 두 선수에게 진심 어린 축하와 고마움을 표한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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