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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염치를 모르는 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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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염치를 모르는 세태

입력
2011.02.09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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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1년여의 연구년을 마치고 미국에서 귀국하는 길이었다. 들고 가기에는 짐이 조금 많아 한국인이 운영하는 포장이사센터에 연락했다. 책이나 작은 물건은 직접 상자에 넣고, 조금 큰 가재도구는 이삿짐센터 직원이 와서 포장해주기로 했다.

이사 당일, 한국인과 남미인 직원이 8시간 눈길을 달려 집에 왔다. 남미 출신 일꾼은 생각보다 민첩하고 성실하게 짐을 포장하고 차에 실었다. 일을 잘한다고 칭찬하자, 한국인 직원은 십 수년의 경험을 꺼내놓았다. 이삿짐을 나르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인데다 혹시라도 귀중품을 분실할 염려 때문에 사람을 잘 골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사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일이 어떤 사람을 쓰느냐가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을 그냥 넘겨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여러 해 경험에서 가장 적당한 '사람'을 남미 특정국가 출신으로 한정했다고 말했다. 이유는 그들만이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란다. 일을 더디게 할 수도 있고 포장을 배우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미국에서 사람을 부리는 일은 매우 어려운데, 특히 약속된 작업시간을 어기고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 사람들, 고객의 귀중품을 훔치고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들 때문에 너무나 골치가 아팠다고 했다. 그러나 남미 특정국가 출신들은 말 그대로 염치를 알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재빠르지 못해도 성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배경을 그들의 자존의식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들이 한국인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도 했다. 스스로 존중할 줄 알기에 스스로 염치를 안다는 말이었다. 사실 염치야말로 한국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의 하나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행동을 절제할 줄 아는 자를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칭송하였다. 그렇기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를 알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예의와 더불어 스스로 잘못과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는 나라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태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몰염치한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도리어 뭘 그 정도를 갖고 그러냐고 반문한다. 심지어 남들도 다 그러는데 자신만 문제 삼느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가족 때문이라든지 사회와 국가에 기여하려던 것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핑계라도 둘러대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는 왜 부끄러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당당하기조차 하다.

맹자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진정 부끄럽지 않게 되고, 부끄러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부끄러움을 아는 일, 즉 염치야말로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자 가치였다. 만일 사람들 사이에 염치가 사라지게 되면 오직 법에 의존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법이 능사가 아니요, 법만으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사람들마다 염치를 알고 스스로 지나친 욕심을 절제할 수 있을 때 사회는 더욱 안정되고 품격을 갖출 수 있다. 법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염치를 아는 일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종교와 교육이 점점 더 세속화하는 시대에 염치를 회복하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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