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입장이 미묘해졌다. 미 행정부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대국민연설을 통해 즉각 퇴진 거부와 함께 몇몇 개혁 조치를 언급했을 때만 해도 그것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며 당혹스러워 했다.
그렇지만 이집트 군부가 11일 무바라크의 개혁 약속을 보증하겠다며 사실상 9월 대선 때까지의 임기 보장을 공언한 상황에서는 무바라크의 개혁조치 불충분에 불만을 토로하기만 할 수는 없는 처지가 됐다. 오히려 이라크 군부가 새로운 입장을 발표하기 전에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과 모하메드 탄타위 이집트 국방장관이 전화통화를 갖는 등 교감의 흔적이 있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이집트 군부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미국이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 퇴진 여부와는 별도로 이집트 최대 실권 세력인 군부의 지지를 받는 '점진적인 권력이양'은 미국이 가장 바라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민주주의도 중요하지만 친미정권의 존속도 핵심적 이해사항이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무바라크의 대국민연설 소식을 듣고 미시건주에서 '경제살리기' 행사를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올 때만해도 그의 입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으로 직행해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실망감은 몇 시간 뒤 발표한 성명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이집트 정부가 국민에 약속했던 구체적 개혁 청사진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며 무라바크가 연설에서 거부한 비상계엄법의 "즉각 철폐"를 재차 요구했다. 또 정권이양에 대해 "신뢰할만하고 구체적이며 모호하지 않은 민주화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하게 압박했다. 무바라크를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오바마 대통령의 지금까지의 성명이나 발언 중 비난 수위가 가장 높았다.
무바라크의 연설과 관련해선 시위 초기에 사태의 '폭발성'을 예상하지 못해 비판을 받았던 미 정보기관이 다시 도마위에 오르기도 했다. 리언 파네타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무바라크 연설 불과 몇 시간 전 하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무바라크가 오늘 밤 사임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며 결국 잘못된 판단으로 드러난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이라며 기대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 같은 미국의 불만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이집트 군부에도 실시간으로 전달됐을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11일 발표된 이집트 군부의 '코뮈니케2'성명은 미국의 고민을 한 시름 덜어줬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이 성명은 9월까지의 무바라크 임기보장을 확인한 측면도 있지만 9월 선거의 공정성과 9월 이후 무바라크의 확실한 퇴장의 이행을 군부가 다짐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급진세력의 집권을 가장 우려하는 미국으로서는 이집트 군부와의 핫라인을 계속 열어놓고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워싱턴=황유석 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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