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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3> 김일성대학 교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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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3> 김일성대학 교수를 만나다

입력
2011.02.0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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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일이다. 남북한 사이가 삼엄하게 꽉꽉 막히고 닫혀져 있던 당시 나는 유럽에서 북한의 교수를 만났다. 그 무렵 남북한의 주민간 상호 왕래는 물론, 해외에서 서로 만나는 것도 금기였다. 분단의 벽이 태산 같았고, 반공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금단(禁斷)과 금기(禁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북의 교수를 둘씩이나 만났다. 유럽 한국학회가 주관하는 학술모임에서였다. 당시 한국학술진흥재단 해외부의 이사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 덕에 해외출장이 비교적 잦았고 학회 참가도 당연히 가능했다.

유럽 한국학회는 1900년대 중반 이후 주로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한국학을 전공하던 한국인 교수들과 서구 교수들이 모여 결성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학자가 단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아시아학을 전공하는 것에 겸해 한국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회원이라고 해봐야 모두 스무 명에도 못 미쳤기 때문에 인원수로는 미미했지만, 그 구실이며 의의는 여간 소중한 게 아니었다. 지금과는 달리 유럽에서조차'코리아'라고 하면 "그게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묻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때이다.

그런 터라 한국학에 주어진 관심은 미미했다. 그럴수록 한국학 발전에 기여하는 학자들로 구성된 한국학회는 여간 소중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학이 장차 떨치고 일어설 단서와 계기를 마련하는데 정성을 쏟고 있었다. 한국학술진흥재단도 그들을 후원하는데 큰 비중을 두고 있었던 터라 나는 여러 차례 그 모임에 출장을 갔었다.

파리와 리옹 그리고 본 등지의 모임에 참석한 뒤 1989년 런던 모임에 참석을 했다. 논문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유럽 구라파 한국학회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한국학술 진흥재단을 대표해서 인사치레로 참가했던 것이다. 그 점은 런던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유럽 한국학회에서는 북한의 관련 교수들을 처음으로 초청했었는데, 나는 그들과 상면할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남한의 교수와 북한의 교수가 해외에서 개최된 학술 모임에 함께 참여한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역사적이고 극적인 만남이었던 것이다.

모임에서 내 가슴은 설?다.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린 김모 교수와 정모 교수를 직접 만났을 때는 그야말로 긴가민가했다. 정모는 김일성 대학, 김모는 과학원 교수였다. 귀국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모 교수는 서울 사범대학 재학 당시, 소위 '국대안 반대'주모자의 한 사람이었다.

해방직후 한동안 일정(日政)의 총독부 시대의 뒤를 이어서 단과 대학별로 따로 갈라져 있던 '서울' 자(字)가 붙은 관립 대학들을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합쳐 국립 서울대학교를 만들자는 게'국대안'이었는데, 그걸 못 받아들이겠다고 좌익의 학생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내세운 기치가 '국대안 반대'다. 김 교수는 그 반대의 앞장을 섰다가 이내 월북했다는 것이다.

이후 김일성 대학을 마치고 그 대학의 교수를 지내다가 과학원의 교수로 옮겨 앉은 것이라고 했다. 골수 좌익분자였던 셈이다. 보나마나 남로당원이었을 그가 숙청의 칼 바람을 피해 오히려 영전을 한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듯 김모는 소위 인민공화국 최고의 엘리트 교수였던 셈인데, 정모 역시 그러기는 마찬가지로 저자의 한 사람이다. 그런 두 교수의 눈에 남조선의 미국인 신부들이 경영하는 대학의 교수가 어떻게 비쳤을까. 그야말로 '반동 중의 반동'으로 여겨졌을 것 같다.

한데 그 반동이 반동답게 기겁하고 놀란 일이 벌어졌다. 그들이 자기의 논문을 소개하는데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를 것"이라고 했다. 얼떨떨해진 내가 얼결에 물었다. "인민공화국에서는 어느 교수 논문이나 그렇습니까?" "그야 당연하죠." 둘은 입을 맞춘 듯 소리 높여 당당히 대답했다. "그럼 논문 주제도요?"내가 재차 다그치자, "물론 물으나마나."그들은 뻐기듯 가슴 펴면서 맞받았다.

더는 할 말을 잃은 나를 두 교수 옆에 앉은 그들의 동행이 괴이쩍듯이 지켜보았다. 그 눈길이 얼마나 매서운지 낯이 따가웠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사내는 두 교수를 감시하기 위해 북한의 특수기관에서 달려 보낸 요원(要員)이라고 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타이르듯이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는 일찍이 남로당 요원으로 월북했습니다. 남한으로서는 금기인물이죠. 한데도 남한 정부는 그 아들을 당신들과 만나는 모임에 참석하게 내버려 두었소. 내가 당신네 만나서 무슨 소리를 하건, 무슨 의견을 말하건, 그건 내 생각대로 내가 알아서 하면 그 뿐이오." 특수 요원이 눈을 부라렸다. 두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입을 닫았다. 모처냅?남북 회동은 이래서 결렬되었다. 무릎 맞대다시피 하고 마주 앉았지만 분단의 벽은 엄청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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