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743
김영승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 '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줄 게 있다고
타임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루는
선풍기
신축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
● 책상 곁에서 글 쓰는 모습 지켜보는 온풍기를 가끔 발로 끈다. 그러다가 김영승의 시가 생각나면 온풍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만물을 하늘같이 공경하는 동학사상은 잘 모르지만, 김영승의 시를 읽었으니까 선풍기든 온풍기(온열기가 맞을 듯)든 발로 끄지 말자. 손을 발이 아닌 손으로 잡기 위해 허리 굽힘이 평등과 평화의 출발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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