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본을 눈으로 볼 때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되는 단위로 세계는 구획되어 간다. 경제나 안보, 문화의 범주에서 국가 사이에 그어진 경계는 흐릿해졌다. 반면 유럽, 아랍, 중남미 등 지역 공동체 단위로 서로를 묶고 가르는 일이 갈수록 잦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은 여전히 국민국가의 단위로 갈등과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최근 발간한 <동아시아 공동체 설립과 평화 구축 연구> 는 동아시아가 구 질서에서 탈피해 하나의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모은 책이다. 한용섭(국방대) 조철호(통일교육원) 손열(연세대) 교수 등 15인의 정치ㆍ안보 전문가들이 2009년 재단으로부터 과제를 받아 공동 연구를 진행한 결과물이다. 동아시아>
논문집 형식인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아시아지역포럼(ARF)의 성격에 주목해 동아시아의 가장 민감한 갈등인 영토 분쟁을 들여다본 시각을 담았다. 2부의 집필자들은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사이의 안보공동체와 경제공동체 형성에 대한 여러 이론을 소개하고 실제와 비교ㆍ검증한다. 3부에서는 소프트파워 개념에 입각해 공통 규범과 가치가 작동하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탐색한 논의들이 소개된다.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21세기 지역주의의 본질을 '강제력의 동원(하드파워)'이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끄는 동의(consentㆍ소프트파워)'에 의한 것으로 파악, 국제정치를 해석한다.
3부의 책임연구자인 손열 교수는 "기존의 동아시아 지역질서 연구는 전통적 정치군사적 대립과 민족주의적 갈등을 부각하거나 탈정치적ㆍ경제적 통합의 진전에 따른 지역화를 강조하는 이분법에 빠져 있어, 주요국들이 소프트파워를 동원해 지역공동체를 엮으려는 '통합의 경쟁'을 하는 새로운 현실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의 전략 부재를 지적한다. 그는 비제국주의 세력으로서의 정체성, 한류로 대표되는 문화, "강대국의 의지를 좌우할 만큼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나, 강대국의 주요 정책을 반대할 수 있"는 균형자의 위치 등을 한국이 가진 소프트파워 자원으로 제시한다.
김상배 서울대 교수는 한국이 정보통신(IT) 분야에서 이룬 성과가 동아시아 지역의 정치ㆍ경제 모델로 확산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는 한국의 온라인 동호회 문화, 디지털 정치참여 모델 등을 언급하며 "한국의 정보화는 인프라 산업 대 콘텐츠, 대중지식 대 고급지식, 국민문화 대 글로벌 문화, 실리 외교 대 매력 외교 등을 대립 축으로 하여 성과와 한계를 내비치는 동시에 이러한 장단점이 하나의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정보화 분야에서 한국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브로커 내지는 스위처(switcher) 역할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전성배 서울대 교수는 한반도의 난제인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위한 소프트파워의 원천으로 전환될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전 교수가 보는 북핵 문제는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동북아 핵경쟁 방지, 정치적 접근을 통한 다자 간 안보문제 해결 등이 중첩된 사안이다. 그는 "한국의 노력은 다자 제도가 미약한 동북아 지역에서 안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전범으로서, 또 중견국 혹은 약소국이 분쟁 당사자로서 소프트파워를 활용하는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1, 2부의 연구는 '아세안+3'에 비해 관심이 덜했던 ARF의 의미와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용섭 교수 등은 "ARF는 조직의 제도화 수준이 높지 않지만 15년 간 남중국해 영토 문제를 핵심 주제로 다뤄왔기 때문에 평화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고, 미국과 러시아가 참여하고 있어 ARF를 중심축으로 지역협력을 논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강조한다. 연구자들은 ARF를 군축, 인권, 소수민족, 테러리즘, 재난, 민주화 등의 이슈를 포함하는 포괄적 안보협력기구로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