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을 한다고 하자 그는 “옷 갈아입어야겠네”라고 말했다. “다른 언론사와의 인터뷰 때 입은 옷으론 안 된다”는 것. 연배를 내세워 은근슬쩍 넘어갈 만한데 그는 사소한 일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꼬장꼬장한 가부장의 이미지는 현실에서도 강렬히 풍겼다.
반세기 넘게 연기하며 젊은 층 사이에선 ‘야동 순재’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순재를 6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는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흰머리와 주름, 연륜을 빼면 여전히 청년 배우였다. 원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어색했다.
이순재는 올해 76세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갈채 받을 나이에 상업영화 주연을 맡았다. 강풀의 동명 만화를 스크린에 옮긴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그는 황혼의 사랑에 빠지는 만석을 연기했다. 오토바이로 우유배달을 하며 험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무뚝뚝하면서도 가슴은 따스한 우리 시대의 평범한 노인장이다. “영화에서 허준의 삶을 그린 사극 ‘집념’(1976)이후 제대로 된 역할”은 35년 만이다. 그는 “우리 늙은이 입장에서 열심히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영화이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라고 말했다. “피부에 와 닿는 인물이라 의지를 가지고 섬세하게 표현해내고 싶었다”고도 덧붙였다.
1956년 서울대 연극회 활동으로 시작한 연기가 벌써 56년째다. 그는 “연극은 고향 같은 것”이라면서도 “연기는 영화 때문에 시작했다”고 밝혔다. “대학 시절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햄릿’ 같은 영화를 보고 연기에 대한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연기에 입문할 때 그의 목표는 “평생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의 연기 목표는 거의 달성된 셈이다.
“배우를 연예인이라고 부르는데 우린 연예인 아니야. 돈 버는 연예인 되려고 연기하는 게 아니지. 난 돈이 아닌 예술을 위해 연기를 시작했고 해왔어. 영화도 배우를 보고선 관람해. (할리우드 배우) 힐러리 스웽크는 번쩍번쩍한 스타가 아닌데도 아카데미상을 두 번 탔어. 그 사람 하는 게 바로 연기야. 우리 드라마에서 최지우 송혜교가 하는 건 연기가 아니야.”
그는 후배들의 월등한 외모와 능력을 높이 사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다들 감성도 좋고 머리도 좋은데 기본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외국은 드라마를 사전 제작하니 미리 연기 훈련을 시켜서 배역을 맡게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 아이들은 역할이 양아치나 검사나 국회의원이나 표정이 똑 같아. 그렇게 하고도 돈을 벌고 스타가 되니 문제가 있는 거지. 제대로 된 연출가가 잡아주지 않으니 자기 연기가 완벽한 줄 알아. 연극 체험을 한 배우가 그래도 잘해. (김)명민이가 기본이 돼 있어. 여자는 김희애가 야무지지. (송)승헌에겐 ‘너 연극 ‘햄릿’ 한번 해봐라’ 그랬어. 요즘 애들 훈련만 하면 할리우드 가서 다 뜰 수 있다고. 다들 고급수출품들인데 그게 아쉬워. 장동건만 뜰게 아니지. 우물쭈물 돈만 벌지 말고 공부 좀 해야지.”
그는 절제된 연기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늙은이들의 절제된 연기가 대단한 작품”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영화 막바지에)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라는 대사가 있는데 시나리오 읽을 때부터 눈물을 흘렸지만 연기할 땐 오히려 눈물을 억제했다”고 했다. “배우가 먼저 울고 웃으면 관객에게 감동의 여지를 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연기는 절제가 필요해. 그런데 요즘은 애드리브 강한 배우가 많아. 사람들은 재미있어 하겠지만 평생 감초배우밖에 못해. (그런)인생이 즐겁고 밥은 먹겠지만 배우의 목적은 그게 아니야. 연기는 예술이야. 비록 난 어느 경지까지 도달하진 못했지만 그걸 위해 노력 했어. 사람들이 딴따라라 칭하고 생활이 궁색해도 좌절하지 않았지. 마누라가 부업으로 만두집 할 때도 안 도와줬어. 내가 너무했지. 연기에 미쳤으니까 그래.”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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