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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의 시로 여는 아침] 사평역(沙平驛)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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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의 시로 여는 아침] 사평역(沙平驛)에서

입력
2011.02.0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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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둘이 읽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시 백팔 수를 뽑아보라면 장고 없이 이 시 한편을 낙점하리라.

청색의 손바닥(시각), 기침소리(청각),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미각, 후각), 눈꽃의 화음(시각), 한줌의 눈물(촉각). 이 시에 등장하는 언어는, 침묵을 간신히 열고 있거나 침묵 속으로 막 빨려 들어가고 있는 언어이고 오감이 다 동원된 언어이다. 이 언어들의 이미지만 연결해 봐도 인생이 그려질 듯하다.

톱밥난로 불빛 속에 적셔둔 청색의 손가락들이 쓰고 있을 사람인자(人) 여덟 개와 톱밥난로에 장인(掌印)으로 찍혔을 사람 인자 여덟 개의 그림자. 팔과 다리가 쓰고 있을 구부러진 사람인자 두 개…. 지난 일과 앞으로의 일, 두 획이 침묵으로 전개할 人자.

때론, 까칠까칠하고 비릿한 굴비를 만지거나 매끄럽고 향긋한 사과를 만지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삶. 그 삶, 그리움 깊어 흘러가는 열차의 불빛도 사람들의 손으로 보였구나. 밝은 손가락 단풍잎처럼 보였구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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