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현장 끊임없는 임금체불·유보
10명 중 7명 임금유보 경험
단계마다 개입 중간업자 탓
30~60일 정도 늦게 지급
10명 중 5명 "체불 겪었다"
벌금형 체불액의 10~15%
당국 단속·처벌 강화 시급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의 한 아파트 신축 건설현장에서 지난 4월부터 일하고 있는 15톤 덤프트럭 기사 권천일(40)씨는 목전에 다가온 설이 반갑지 않다.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분 임금 500여만원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씨를 비롯 30여명의 덤프트럭 기사들이 받지 못한 노임은 모두 8,000여만원. 밀린 임금을 독촉할 때마다 "원청업체가 주는 공사대금이 밀려서 그렇다. 조금만 참아달라"고 무마했던 하청업체는 설상가상으로 이달초 부도를 내버렸다. 돈을 받을 길이 막막해진 이들은 지난주부터 운전대를 내려놓고 강남구 대치동의 원청업체 사무실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고 있지만 체불액의 절반만 주겠다는 반응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갈 지경이다. 권씨는 "하청업체 관리에 무관심한 원청업체나 원청업체에서 공사금액을 받으면 노동자들에게는 3개월짜리 어음을 주는 하청업체의 행태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며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몇년 만에 최고였다지만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쪽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고 하소연했다.
경기 성남시 판교 신도시 한 민간연구소 건설현장에서 지난 10월부터 목수일을 하고 있는 신모(58)씨도 이번 설에는 대전 고향집으로의 귀향을 포기했다. 11월말부터 지금까지 임금을 한번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장업체는 지난달 말 "일부라도 주겠다"고 약속한 뒤로 감감 무소식이다. 400만원에 이르는 밀린 임금은 언제 받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4인 가족의 가장으로 벌써 2개월째 카드 돌려막기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신씨는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지만 당장 병원비도 못 내고 있는 동료도 있다"며 "건설업계의 상습적인 체불 관행이 좀처럼 나아지고 있지 않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임금을 예정일보다 늦게 지급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때문에 건설경기 침체 속에 설을 앞둔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 건설ㆍ기계노동자들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은 임금을 정산일보다 30일에서 60일 정도 늦게 받는 게 관행처럼 돼있다. '발주처-원청업체-하청업체'이상의 다단계 도급은 불법이지만 각 단계마다 개입하는 중간업자들 때문에 임금 지급이 늦어지는 것이다. 전국건설노조에 따르면 임금 유보기간은 최저 30일(수도권)에서 43일(대구ㆍ경북)까지다. 전국 평균은 32일이다. 1월1일부터 1월31일까지 일한 임금을 3월초에나 받는다는 뜻이다. 지난해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 중 유보임금을 경험한 사례가 68.8%, 체불임금을 경험한 사례가 51.1%에 달한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불합리한 유보임금 관행의 근절, 취약관리 사업장에 대한 집중관리 등 대책이란 대책은 모두 내놓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실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전국건설노조도 지난해부터 공사대금 유보기간을 14일 이내로 줄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신씨는 " 사정이 나은 수도권에서도 30일 이내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50%도 되지 않는다"며 "건설현장의 임금이 20년째 묶여있는 상태에서 유보임금 관행의 근절과 체불업체에 대한 엄한 처벌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건설업계의 체불관련 사법처리 4,922건 가운데 사업주가 구속된 것은 11건에 불과하다.
박성우 민주노총 서울본부 법규국장은 "체불로 형사처벌이 되더라도 체불업체에는 대부분 전체 체불액수의 10~15%의 벌금형에 처해지는 것이 고작"이라며 "임금 체불이 사회적 중범죄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이 근원적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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