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넘실대는 북악 산자락과 빌딩숲 서울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눈이 내리길 기다렸다. 서울의 산책코스를 가슴에 담기엔 아무래도 흰 눈이 도시의 잿빛을 많이 가릴 때가 좋을 것 같았다. 미리 마음에 점 찍어 놓은 서울의 산책로는 지인들이 강력 추천해온 북악하늘길이었다.
마침 지난 밤 눈이 많이 내렸기에 이른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아무도 밟지 않은 서울의 눈길을 걸어보나 했는데 이미 눈길 위엔 사람들의 발자국이 많았다.
북악골프연습장 옆에서 시작한 산책로는 하늘전망대로 향했다. 이따금 마주 오는 사람들이 있어 목례를 건네고 "수고하십니다" 말을 붙여보는데 대부분 무응답으로 바삐 지나친다. 설경의 서정에 젖어 서울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역시 서울은 서울인가 보다.
작은 체육공원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눈길이 미끄러워 안 나오려 했는데, 여길 안 오면 몸이 더 쑤셔대니 어떡해. 이렇게 걷고 들어가면 머리도 안 아프고 좋다"고 하신다. 할머니에게 북악하늘길은 비타민이고 진통제였다.
체육공원을 지나면서 길은 북악산길 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든다. 동마루를 지나고 하늘전망대를 지나자 호경암이다. 1968년 1.21 사태의 흔적을 안고 있는 바위다. 김신조 등 북한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했을 때, 우리 군경과 총격전을 펼쳤고 바위엔 그 때 탄흔이 깊게 새겨져 있다. 하늘전망대에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그래서 '김신조 루트'란 별칭을 지닌다.
호경암부터가 북악하늘길의 하이라이트다. 갑자기 숲이 열리고 서울의 너른 하늘이 펼쳐진다. 눈을 가득 이고 있는 북악의 산자락이 넘실거리고, 능선 위엔 긴 서울성곽이 함께 출렁인다. 성곽 너머로는 순백의 빌딩숲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숲과 산이 두른 넉넉한 품과, 성곽이 전해주는 600년 고도의 정취가 어울려 서울은 이렇게 아늑하고 스스로를 뽐낸다. 눈 때문만이 아니다. 그 출렁이는 선으로 짐작하건대 서울은 눈이 없어도 예쁜 곳이었다. 단지 이제껏 그걸 몰랐던 것뿐이다.
북악하늘길은 그 수려한 풍경 한가운데로 이어진다. 계속된 계단길로 걸음이 편치 않았지만 마음은 흥겹다. 고단하게만 느꼈던 내 삶의 터전이 이렇게 아름다웠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북악하늘길은 4개의 코스가 얼기설기 엮어져 있다. 서울성곽 옆 말바위쉼터에서 북악팔각정까지가 1코스(1,397m), 하늘교에서 호경암 남마루 성북천발원지로 이어지는 2코스(일명 김신조루트ㆍ1,950m), 숲속다리와 북카페를 잇는 3코스(640m)와 정릉 아리랑고개 옆 하늘한마당서 시작해 하늘마루로 이어진 4코스(3,200m)다.
북악하늘길은 서울성곽길인 숙정문코스와 와룡공원으로도 연결돼 좀더 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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