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과일은 동쪽이라고. 넌 홍동백서(紅東白西)도 못 들어봤냐." 전인중(57)씨의 호통에 흠칫 놀란 심명현(36)씨가 재빠르게 사과와 배를 담은 접시를 바꿔놓고는 씩 웃었다. '차례상 차리는 법'이 인쇄된 종이가 잔소리를 늘어놓던 전씨의 손에 들려 있는 걸 눈치챈 터였다. 머쓱해진 전씨는 "너무 오랜만이라 나도 다 까먹은 걸 어쩌냐. 그래도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라며 헛기침을 해댔다.
설날인 3일 오전 서울 방배동의 한 임대주택. 차례상 대신 그만한 크기의 흰 종이가 방바닥에 깔렸다. 상이 없는데 제기(祭器)가 있을 리 만무했다. 집 주인 배동효(47)씨가 한 마디 건넨다. "노숙자 생활을 청산하고 7년 만에 차리는 차례상입니다. 물가가 너무 올라 고기는 사지도 못했지만 정성은 다했습니다."
이들 세 명은 1,2년 전만 해도 차례는커녕 거리를 헤매며 자신들의 끼니 걱정을 하던 신세였다. 그러다 두 달 전 복지관의 도움으로 배씨가 이곳 임대주택에 터전을 마련했고, 거리에서 만난 형제 같은 이들에게 함께 차례를 지내자고 제안해 이 자리가 마련됐다. 배씨는 다만 그가 만든 모임인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 회원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회원 14명이 직접 만든 찐빵을 나눠주는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배씨가 만든 잡채, 나물, 호박전에 전씨와 심씨가 끓인 떡국을 놓으니 그나마 구색을 갖춘 차례상이 완성됐다. 말쑥하게 양복까지 차려 입은 배씨가 먼저 절을 올렸다. "아버님 산소도 한 번 찾아가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드세요." 연신 싱글벙글했던 배씨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2004년 운영하던 사업체의 부도, 아버지의 죽음, 이어진 노숙생활, 아내와의 이혼 등 아픈 기억이 새삼 되살아났다. "저랑 같이 영등포역에서 지내던 8명이 다 죽었어요. 얼어 죽고, 술 많이 먹어 아파 죽고, 교통사고로 죽었죠." 훈수를 두느라 목청을 높였던 전씨도, 느물대던 막내 심씨도 이 때만큼은 입을 앙다물었다. 27㎡ 남짓한 공간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차례상 앞에서 이들은 올해 꼭 떳떳한 모습으로 가족을 다시 찾겠다고 다짐했다. 꿈에 다가서기 위해 배씨는 2009년 3월 자격증을 따 요양보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전씨와 심씨도 탈노숙 중이다. 둘은 우선 거리를 벗어나 쪽방촌과 고시텔로 각각 거처를 옮겼다. 거리 화단에 꽃을 심고, 불법 부착된 포스터를 떼는 등 자활근로로 매달 버는 40만원을 쪼개 저축까지 하고 있다. 전씨는 아버지를, 심씨는 인천에 계신 할머니를 꼭 찾아 뵙겠다고 했다.
차례가 끝나고 이들은 다 같이 둘러앉아 따뜻한 떡국을 맛봤다. 떡과 파만 들어있는 떡국이 싱겁다고 배씨가 핀잔을 주자 심씨가 버럭 화를 냈다. "형님, 인생의 쓴맛 짠맛 다 봤으니 음식이라도 싱겁게 드셔야지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떡국 한 그릇이 뚝딱 비워졌다.
글ㆍ사진=강윤주 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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