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에 세운 50년 계획… 허풍 아닌 진짜 태풍이었다
빌 게이츠가 자신에 못지 않는 '승부사(risk taker)'로 인정한 손정의(孫正義ㆍ일본명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 포브스에 따르면 지난해 3월 현재 손 회장의 재산은 59억달러로 세계 127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에도 55위로 이름을 올렸다.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 산토리의 사지 노부타다, 모리트러스트의 모리 아키라에 이어 일본의 4번째 갑부이다.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와 손정의
야스모토 마사요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소년 손정의에게'재일 한인 3세'라는 뿌리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멍에였다. 이 때문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픈 꿈마저 포기해야 했다. 손정의는 1957년 8월 일본 남쪽 큐슈의 사가현의 한인 밀집 지역인 무허가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나이에 탄광 노동자로 일본에 건너온 할아버지 손종경씨의 고향은 대구.
손정의의 부모는 가난 탈출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버지 손삼헌씨는 밀조주를 만들어 팔 정도로 안 해본 일이 없었고, 파친코 사업 등으로 돈을 벌었다. 교육열도 높았고 공부를 잘하는 차남 손정의에 대한 기대도 컸다. 손정의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가족들은 큐슈 최대도시 후쿠오카로 이사해 명문고 진학률이 높기로 유명한 조난중학교에 전학시켰다.
명문 구루메대학 부설고에 입학했지만, 1학년 때 생애 첫 승부를 건다. 버클리대로 4주간 어학연수를 다녀온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미국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야스모토가 아닌 손 마사요시로 살아도 차별 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읽었던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의 주인공, 에도 막부 말기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닮고 싶은 생각 또한 미국 유학에 대한 열망을 키우는데 큰 몫을 했다.
미국에서 고교 과정을 단 3주만에 마친 일화는 유명하다. 두둑한 배짱 하나는 타고난 셈. 6개월간 어학코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세라몬테고에 2학년으로 편입하는데, 월반을 거듭하더니 3주 만에 고교 졸업 검정고시에 도전한다. 시험문제를 풀기엔 영어 실력이 서툴렀지만, 그는 감독관에게 "영어 실력을 보는 게 아니지 않냐"며 사전 사용과 시험시간 연장 허락을 받아냈다.
손정의는 90년 일본에 귀화했다. "한국 국적으로는 여권 발급이 번거롭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 이름은 지켰다. 일본 정부가 '손씨 성을 가진 일본인이 없다'는 이유로 귀화하려면 성부터 바꾸라고 요구했으나, 미국 유학 때 만나 결혼한 일본인 부인 오노 마사미(大野優美)를 먼저 손씨로 개명시키면서까지 손씨 성을 지켰다.
인생 50년 계획과 소프트뱅크
손정의는 미국에서 홀리네임스 칼리지를 다니다가 77년 버클리대 경제학부로 편입했다. 만 19세, 대학 3학년의 청년 손정의는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다. '20대에 이름을 떨치고, 30대에 1,000억엔 자금을 모으고, 40대엔 일생일대의 승부를 걸어, 50대에 사업을 완성시키고, 60대에 사업을 후계자에게 물려준다'는 계획이었는데, 놀랍게도 이후의 삶은 이에 맞춰 착착 진행돼 왔다.
버클리대 재학 시절, 그는 학업과 사업을 병행했다. 이 때 고안한 발명 아이템 전자음성번역기를 샤프에 팔고 받은 1억엔을 종잣돈으로, 소프트웨어회사 유니손월드를 설립했다. 당시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인베이더' 게임을 미국에 수입해 6개월만에 1억엔 넘는 이익을 냈다.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온 손정의는 스물 네 살이 된 81년9월, 자본금 1,000만엔으로 소프트뱅크를 세웠다. 당시엔 지금의 소프트뱅크를 상상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손정의는 세상 사람들이 '허풍'이라고 해도 큰 꿈을 꿨다. 아르바이트 사원 2명밖에 없는 회사 사무실에서 사과 궤짝 위에 서서 "5년 뒤 매출 100억엔, 10년 뒤 500억엔 돌파"를 선언한 것. 기가 막힌 아르바이트생들은 금방 회사를 그만 뒀으나, 때마침 전자오락과 퍼스널컴퓨터(PC) 붐이 일면서 회사는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1년 만에 사원 30명에 매출 20억엔, 83년에는 사원 125명의 매출 45억엔 회사로 성장했다.
막대한 부를 일구고 성공도 했지만, 손정의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보수적인 일본 재계에선 끊임없는 인수합병(M&A)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그를 두고, '사업다운 사업은 하지 않으며, 기업사냥을 하는 도박꾼이다'라는 비난도 일었다. 무리한 사업 확장에 소프트뱅크의 몰락을 점치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실제로 그는 90년대 중반 들어 M&A에 열중했다.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행사인 컴덱스를 인수했고, 창립 1년밖에 안된 미국 야후의 최대 주주가 됐다. 세계 최대 컴퓨터출판사 지프데이비스 출판 부문도 인수했다. 호주의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과 손잡고, 테레비아사히 지분 21%를 확보하며 인수를 시도했으나 여론의 뭇매도 맞았다.
그러나 소프트뱅크는 날로 번창했다. 98년 1월에는 장외시장 등록 4년만에 도쿄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됐다. 2000년대 들어선 소프트뱅크 사업의 중심축이 PC소프트웨어ㆍ출판에서 통신으로 이동했다. 브로드밴드 사업인 야후BB는 파라솔 부대로 불리는 공격적인 판촉활동으로 1년만에 100만, 2년만에 300만 가입자를 확보했다. 2006년에는 만년 꼴찌 통신업체 보다폰 재팬을 일본 M&A 사상 최대금액(2조엔)을 주고 사들였다.
그가 정한 50년 계획에 따르면 지금은 사업을 완성하는 단계. 창업 30주년을 맞은 지난해 9월 현재 소프트뱅크는 자회사 117개사, 투자회사 79개를 거느린 거함이 됐다. 2000년 4,232억엔이던 그룹의 순매출은 10년 만에 2조7,000억엔으로 급증했다. 작년 6월에 발표한 '신 30년 비전'은 더욱 거창한 꿈을 담아 화제를 모았다. 30년 후 시가총액 200조엔, 계열사 5,000개를 거느린 세계 톱 10 기업이 되겠다는 구상이다. 지금 시가총액보다 100배나 큰 기업집단을 만든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에는 '손정의 2.0'(후계자)를 키우는 위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도 개교했다. 손정의는 최근 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창업 첫날부터 맹세한 '디지털 정보혁명 실현'을 이뤄내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30년간 무아지경으로 달려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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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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