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대법원의 박연차 게이트 관련 선고에서 이광재 강원도지사와 민주당 서갑원 의원,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모두 항소심 판결이 그대로 유지됐지만 결과적으로 이 지사와 서 의원은 고개를 떨궜고, 박 의원은 웃을 수 있었다. 이들의 운명이 엇갈린 주된 이유는 법원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진술의 신빙성을 사안마다 달리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금융자료 등 객관적 물증 없이 오로지 돈을 건넸다는 박 전 회장의 기억과 진술에 근거해 기소됐다. 따라서 법원이 박 전 회장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면 유죄, 배척하면 무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지사는 2004년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사돈으로부터 1,000만원을 받고 2004~2008년 박 전 회장으로부터 미화 12만 달러와 2,000만원, 2006년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으로부터 2만 달러를 받는 등 총 7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이 지사는 모든 혐의를 전면 부인했지만 대법원은 그가 박 전 회장으로부터 7만5,000달러, 정 전 회장으로부터 2만 달러를 받은 부분 등 4가지 혐의를 인정한 항소심 판단을 유지했다.
재판부가 유죄 판단의 근거로 꼽은 것은 우선 공여자들의 진술이 구체적이라는 점이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정황도 있었다. 박 전 회장이 돈을 건넸다는 시내 호텔 및 식당의 신용카드 전표, 해당 일정이 적힌 박 전 회장 여비서의 다이어리 등이다.
대법원은 서 의원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로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서 의원은 2006년 5월 경남 김해의 한 골프장에서 박 전 회장으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됐는데, 법원은 금품을 건넸다고 주장한 박 전 회장과 돈을 전달한 증인들의 진술에 일관성이 있고 모순이 없다며 서 의원이 5,000만원이 든 쇼핑백을 건네 받은 것으로 판단했다.
반면 박 의원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2008년 3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박 전 회장으로부터 미화 2만 달러를 건네 받은 혐의로 기소됐지만 대법원은 무죄로 본 항소심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박 전 회장이 3선 국회의원으로 얼굴이 널리 알려진 박 의원에게 처음 만난 당일 공개적 장소인 호텔 화장실 입구에서 2만달러를 주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언론사 대표로 재직할 때 박 전 회장으로부터 불리한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미화 2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상철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의 경우는 박 전 회장의 지나치게 상세한 진술이 오히려 무죄 선고의 근거가 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박 전 회장이 피고인과 만난 식사자리의 좌석 배치나 마신 술의 종류와 양, 동석자를 부른 경위, 돈의 출처 등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의 기억 내용이 감소한다는 판례에 비춰보더라도 의심스럽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날 "금품 제공자의 진술이 증거능력이 있으려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만한 신빙성이 있어야 하고, 진술 내용의 일관성뿐 아니라 금품 제공자의 인간 됨됨이, 진술로 얻게 되는 이해관계 유무, 수사 대상인 진술자가 궁박한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진술에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피고인이 금품 수수 사실을 부인하고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물증이 없을 경우 금품 제공자의 진술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에 대해 법원이 확립된 판례로서 갖고 있는 나름의 기준이라는 게 대법원의 설명이다. 여러 요소들을 고려해 사안별로 판단해야 하는 만큼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도 사건마다 유ㆍ무죄가 엇갈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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