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전설에서는 북유럽의 바이킹과 카리브해 해적 등이 악명 높다. 그러나 고대 지중해 연안 도시국가는 물론이고 스페인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슬라브 아랍 인도 중국 일본 등 일찍이 바다로 나간 모든 민족이 무리 지어 해적질을 했다. 국가가 영역 확대와 전쟁 등에 해적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국익을 해치는 해적 행위는 가혹하게 처벌했다. 해상 교역을 생존과 번영의 수단으로 삼은 해양 국가들은 대역죄로 다스렸다. 영국의 헨리 3세는 1241년 해적의 목을 매단 뒤 물에 집어넣었다가 말 네 필로 사지를 찢어 능지처참했다는 기록이 있다.
■ 악명 높은 해적들을 몸에 꼭 맞게 쇠로 만든 틀에 가둔 뒤 템즈 강가에 높이 걸어 말려 죽이기도 했다. 그렇게 2년 동안 매달린 해적도 있다. 바다를 지배한 대영제국의 영광은 그렇게 이룬 것이다. 공개 처형은 거의 19세기까지 시행됐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참혹한 광경을 군중들은 즐겼으며, 신문은 처형 장면을 리얼하게 전했다. 영국뿐 아니라 어디든 대개 그랬다. 그래도 재판 절차는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포로로 잡은 해적의 목을 그 자리에서 치거나 돛대에 매다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 바다의 질서에 관한 국제 해사법은 일찍부터 해적을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간주했다. 1789년 미국 헌법은"공해상 해적 행위는 종신형에 처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국제 무역선이 대형화하고 해군력이 비약적으로 증강되면서 해적은 소멸된 듯했다. 말라카 해협 등에서 조무래기들이 설친다지만, 해양 대국들의 해적 재판은 역사의 유물이 됐다. 지난해 소말리아 해역에서 미 해군 함정을 상선으로 오인해 공격했다가 나포돼 미국으로 압송된 해적들에 대한 재판은 150년 만의 사건이었다.
■ 미 법원은 종신형과 30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애초 기소 여부를 놓고 결정이 엇갈려 파란을 겪었다. 앞서 소말리아 해적을 기소한 네델란드 독일 등 유럽국가들도 엄격한 피의자 인권보호와 해적들의 망명 신청 때문에 곤혹스럽다. 국제 지원을 받고 해적 재판을 대행하던 인접국 케냐가 지원이 적다며 손을 뗀 것이 화근이다. 인도는 해적 처벌을 포기했고, 러시아는 해적을 풀어주는 척하면서 모두 사살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선조들이 하던 대로"라고 말했다. 삼호주얼리호 선장을 사경(死境)에 빠뜨린 해적들을 엄히 다스리는 것은 좋지만,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미리 잘 헤아려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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