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쌓인 앙금 이젠 풀려… 아버지의 복지국가^평화통일 뜻 알리고파"
대법원이 죽산 조봉암(1898~1959)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20일 그의 아들 조규호(62)씨는 "육십 평생에서 가장 좋은 날"이라는 말로 기쁨을 표현했다. 이날 대법원은 52년 전 간첩으로 몰려 사형된 조봉암에 대한 재심사건 선거공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조규호씨는 "선고가 나기 전 손발이 저릴 정도로 떨렸다"며 "아버지의 명예가 달린 일인만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무죄 선고 후 경기 안성에 있는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무죄 판결의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지난 세월을 돌아보았다.
_원을 풀었는가.
"그렇다. 50년 동안 쌓인 앙금이 사라졌다. 무죄 판결이 난 날 두 누나 등과 함께 서울 망우리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했다. '오늘 좋은 일이 있었으니 이제 편히 쉬시라'고 마음 속으로 말씀 드렸다. 대법원에서 보내온 판결문을 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_묘비의 뒷부분에 새길 내용은 생각해놓았는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묘소를 만들 때 경찰이 처음에는 비석도 못 세우게 했다. 겨우 비석을 세웠지만 비문은 새기지 못했다. 비석 앞에는 죽산조봉암선생지묘라고 써있지만 뒤는 비어있다. 누나 등과 상의해 새겨 넣을 내용을 정하겠다. 2007년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작사건으로 결론 내리고 재심을 권고했지만 재심 판결이 자꾸 늦춰져 맥이 빠지면서 비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10여 년 전에 묘소 입구에 별도의 석조물을 세우고 거기에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일념에서 했을 뿐'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새겨 넣은 것은 있다."
_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기억이 나나.
"아버지가 1958년 끌려가 그 다음해에 사형이 집행됐는데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겨우 열 살이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게 당신의 일을 알지 못하게 했고 면회도 오지 못하게 했다. 워낙 살벌하던 시절이라 가급적 아들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도록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보호하려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열살 짜리 아들이 매우 보고 싶었을 것이다."
_구체적인 일은 몰랐더라도 뭔가 이상한 느낌은 받지 않았는가.
"그렇다. 어린 나이였지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두 누나와, 우리 집에 살던 사촌 형이 아버지를 면회하고 재판장에도 나갔지만 내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국전쟁 당시 명륜동 집에서 실종됐기 때문에 큰 누나가 많이 뛰어다녔다. 아버지가 사형될 때 큰 누나는 나이 서른 하나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비극을 보면서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누나는 이번에도 재심 판결을 앞두고 적잖이 신경을 썼고 그 때문에 몸이 좀 상하기도 했다. 내가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것은 열 아홉 살 때다. 아버지의 운전기사를 했던 분이 '이제 너도 컸으니까 진실을 알아야 한다'며 전말을 이야기해주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현대사에 관한 책도 찾아 읽고 세상을 알려고 했다."
_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말수가 적었지만 나를 볼 때는 늘 웃었다. 내 생일에는 화신백화점으로 데려가 장난감이나 만화를 고르게 했다. 아버지는 나와 장난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직동에 살 때는 둘이서 장난을 치다가 유리창을 깬 적이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기사 아저씨께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썼다가 아버지께 혼이 났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아버지께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쓰고 있던 적이 많은데 그 때문에 그의 뒷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_아버지가 잡혀간 뒤 보고 싶지 않았나.
"59년 사형이 집행된 뒤 아버지 시신이 트럭에 실려 집으로 왔다. 그것은 똑똑하게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대성통곡을 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경황이 없었다. 이후 영정을 세우고 향을 피우는 식으로 3년 상을 치렀다. 사진 속의 아버지가 금방이라도 달려와 나를 부를 것 같았다."
_아버지가 숨진 뒤 생활이 어떻게 바뀌었나.
"장충동 집에서 나와 금호동으로 옮겼다. 장충동은 지인이 살라고 내어준 집인데 꽤 좋았다. 금호동 집은 허허벌판에 서있는 한옥이었는데 경찰이 '간첩의 집' 표시를 한다며 새끼줄을 둘러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직 어려서 새끼줄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몰랐고 따라서 특별한 느낌도 없었다. 그때 집안 살림을 이끌던 사촌 형수가 쌀이 떨어졌다는 등의 내용을 적은 쪽지를 내 양말에 넣어 주면 내가 그것을, 결혼해 따로 살고 있는 누나에게 보여준 뒤 돈을 받아오기도 했다. 출입이 자유롭지는 못했어도 아버지 기일이 되면 집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 그 분들이 음식을 같이 만들어 망우리 묘지에 가져갔다. 묘지에 사람 모이는 것도 방해를 받았지만 몰래 산을 돌아서 오는 등의 방법으로 한 300~400명 정도는 모였던 것 같다."
_사람들의 시선은 어땠나.
"금호동 집이 외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느낄 일은 없었다. 오히려 초등학교 다닐 때 사람들이 나를 보면 붙들고 많이들 울었다. 그러면서 '네가 훌륭하게 돼야 아버지가 덜 원통할 것'이라는 식의 말을 해주었다. 그때는 그 뜻을 정확하게 몰랐다."
_경제적으로 어려웠나.
"금호동으로 옮긴 뒤 꽤 어려웠다. 하지만 그 뒤 사촌 형수가 사업을 하면서 그럭저럭 살만 했다. 사촌 형과 형수는 우리 집에 함께 살면서 사실상 친형, 친형수 역할을 했다. 그 형수가 집안을 꾸리다시피 했다."
_학교 생활은 어땠나.
"나 몰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중ㆍ고교 때 선생님들이 나를 보고 '네가 누구길래 이런 저런 압력이 들어오는 거지?'하며 물어보곤 했다. 내 처지를 알고 위로해준 선생님도 많다."
_사회 생활은.
"첫 직장이 제약회사였는데 어느 날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그냥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입사 1년 반 만에 퇴사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1년 이상 한 직장을 다닌 적이 거의 없다. 지금까지 수십 군데에서 일했다. 군대에서도 김포의 공수특전단에 있다가 갑자기 광주의 공병대로 보내졌는데 그 이유가 신원부적격이었다. 외국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1979년인가 친구가 내게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 한번 나가보라고 권했다. 그 친구의 후배가 그 회사 사장으로 있어서 서류도 보내고 현지에 가기로 다 결정이 나있었는데 출국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지인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문의하는 지인에게 그쪽 사람이 나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 세상에 환멸을 느꼈다. 전두환 정권 때까지는 우리가 이사를 하든가 하면 경찰이 집에 찾아왔다. 지금은 물론 그런 일이 없다."
_아버지 수사와 재판에 관여한 검사와 판사들이 원망스럽지 않은가.
"있지도 않은 죄로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그들이 굉장히 미웠다. 하지만 당시 그 사건에 관여했던 검사, 판사 대부분이 작고했다. 그들에게 서운한 점이 있어도 이제는 다 잊었다. 그들을 원망한들 무엇하겠는가."
_유병진 판사는 1심에서 아버지에게 5년 형을 선고한 뒤 가벼운 형량을 내렸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었는데.
"고마운 분이다. 아버지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용공판사로 몰렸고 끝내 권력의 미움을 받아 옷을 벗었다. 그 분은 아버지 기일마다 묘소를 찾아와 '5년형을 선고한 뒤 마음이 너무 아팠다'며 '아버지께 사죄한다'고 말했다."
_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재심을 앞두고 실제로 무죄 판결이 날지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가슴이 답답했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20여분에 걸쳐 판결문을 읽을 때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주창했던 것들, 가령 착취 없는 복지국가라든가 수탈 없는 경제체제, 남북한 평화통일, 생산물의 공정분배 같은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그런 뜻을 좀 더 알리고 싶다."
■ 장택상·윤치영 등 구명 운동당시에도 사법살인 비판 받아
해방 후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은 간첩 양명산으로부터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등의 혐의를 받고 58년 기소됐다. 1심에서 5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59년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조봉암은 이승만에 맞서 2,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며 특히 3대 대선에서는 216만표로 30%의 지지율을 얻어 이승만을 긴장시켰다. 그는 대선에서 패한 뒤 56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진보당은 평화통일론, 기간산업 및 거대기업체의 국유화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장택상, 윤치영 등 강경 반공주의자들조차 조봉암의 구명에 나섰지만 무위에 그쳤으며 그래서 그의 사형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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