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2월 8일 발행된 관보(제1720호)에 당시 이호 법무장관의 고시가 실렸다. '중화민국 산동성이 본적인 손일승(45세) 씨에게 귀화를 허가한다'는 내용이었다. 1933년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와 강원도에서 탄광을 운영하던 손씨는 평소 한국을 좋아했으며 사업을 위해서도 한국인이 되는 게 나을 듯하여 귀화를 신청했다고 한다. 정부 수립 후 최초의 귀화인이었다.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밀려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를 확장해 나가자 한반도와 가까운 산동반도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많았다. 한국이 좋아서, 사업을 위해서 귀화를 신청하곤 했다.
■ 우리 역사에 처음 귀화인으로 기록된 이는 중국 후주(後周) 출신의 쌍기(雙冀)다. 956년(고려 광종 7년) 사신을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들어 귀국하지 못했는데, 재능을 크게 흠모한 광종이 벼슬을 주며 고려인으로 살기를 부탁했다. 후주 산동지역의 지방수령을 지내던 그의 아버지까지 고려에 넘어와 벼슬을 받았다. 958년 쌍기는 고려에 과거제도 시행을 건의하고 스스로 시험관이 되어 광종의 인사개혁을 뒷받침했다. 당시 고려는 후주로부터 쌍기를 신하로 삼아도 좋다는 허락을 거꾸로 받아야 했으니 일반적 귀화와는 의미가 좀 다르겠다.
■ 24일 법무부가 인도 출신 로이 알록 쿠마르(55ㆍ부산외국어대 교수) 씨에게 귀화를 허가했다. 정부 수립 후 '1호 손씨'로 시작해 54년 만에 10만 번째 귀화인이다. 2000년까지 44년 동안 모두 2,000명을 넘지 않았으나 이후 10년 동안 9만8,000여명이 허가를 받았다. 특히 최근 5년간의 귀화인 수가 전체의 70%다. 이런 추세라면 몇 년 안에 20만 번째 귀화인이 나올 터이다. 귀화인이라는 말이 생소하지만, 그냥 '한국국적 취득자'이다. 한국국적의 취득 장벽을 완화한 국적법이 개정돼 올해부터 시행되고 있고, 이민청 설립 논의도 구체화하고 있다.
■ 귀화를 신청하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한국이 좋아서, 사업(일)을 위해서'그렇게 한다. 이제는 '한국을 좋아하게 만들고, 일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 그들을 데리고 오려는 노력을 하는, 고려인 쌍기와 같은 경우도 염두에 둬야 할 형편이다. 순혈주의에 익숙한 우리사회는 한국국적을 취득한 외국 출신 사람들을 한국인으로 받아들이기에 여전히 인색하다. 쿠마르씨는 1980년 정부 장학생으로 입국, 한국인과 결혼해 두 딸을 두었으니 30년을 한국인으로 살았다. 그는 말한다. "꽃이 피면 벌이 모입니다. 하지만 벌이 오지 않으면 꽃도 피지 않습니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