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은지의 속옷에 피가 묻어 나왔을 때, 그게 생리혈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좀 큰 편이긴 했지만 비만도 아니었고, 여태껏 건강하게 잘 자라준 딸이다. 불안한 마음에 뒤진 인터넷에서 ‘성조숙증’이라는 낯선 병명이 자꾸 눈에 걸렸다. 찬찬히 훑어보니 딸애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있다.
허겁지겁 병원을 찾았다. 병명은 역시 성조숙증. 이미 유방 발달이 상당히 진행됐고, 초경도 시작됐단다. 여덟 살에 초경이라니…. 누가 우리 아이 인생에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나. 이렇게 유년기를 박탈당해도 되는 걸까. 대포가 뚫고 지나간 것마냥 가슴이 휑하다.
이 어린 것이 매일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고, 4주에 한번씩은 성호르몬 억제제도 투여 받아야 한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다고 다독이면서도 내가 자꾸 눈물바람이다.”
이차성징이 지나치게 일찍 시작되는 성조숙증이 급증하고 있다. 사춘기 연령이 전반적으로 빨라지면서 여자 아이는 만 8세 이전, 남자 아이는 9세 이전에 이차성징이 나타나는 ‘성장의 속도 위반’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일보가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의뢰해 건네받은 ‘건강보험 성조숙증 진료실적’ 자료에 따르면, 의료기관에서 성조숙증 진료를 받은 아이들은 5년 새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2005년 371명이었던 진료 인원은 2009년 3,398명으로 늘어났다. 지난해에는 1~9월 2,792명이 진료를 받았다. 월평균으로 따지면 2009년 283명에서 지난해 310명으로 증가했다. 진료 인원 중 실제 성조숙증으로 최종 확정 진단을 받은 인원은 약 3분의 1가량 되는 것으로 의료계는 추산하고 있다.
의학적으로 성조숙증은 조기 사춘기와 구별된다. 조기 사춘기가 여아 9~10세, 남아 10~11세에 이차성징이 나타나는 조금 빠른 사춘기인 데 반해, 성조숙증은 여아는 유방 발달이 8세 이전, 음모발달 9세 이전, 초경이 9.5세 이전에, 남아는 고환 발달이 9세 이전에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성조숙증의 가장 큰 문제는 신체 성장이 멈춘다는 점이다. 어린 나이에 성장이 완료돼 키가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체기관의 성장도 같이 멈춘다. 고시환 성장클리닉의 고시환 원장(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은 “신체기관은 18~21세까지 성장해야 하는데 성조숙증 환자의 경우 그렇지 못해 일찍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며 “장년기 질환이 20, 30대에 발병하는 등 전반적인 라이프사이클이 교란되는 점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일생 동안 성호르몬에 노출되는 기간이 길어져 유방암, 자궁암 등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
정신 연령과 신체 연령이 일치하지 않음으로 인해 아이들이 겪는 심리적, 정서적 고통도 크다. 외부의 성적(性的) 시선에 제대로 대처할 능력이 없어 내성적, 소극적 성격으로 변할 수 있고, 작은 키, 큰 몸에 대한 콤플렉스로 자존감도 낮아진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강희경기자 k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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