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애잔한 낭송회는 처음이네요.” 사회를 보던 문학평론가 신형철씨가 던진 말대로, 이별을 겪은 오래된 연인들의 해후 같았다. 처음 만난 사이건만, 연정(戀情)은 사무치게 익어있었다. 시(詩)의 몸으로 오랜 시간 마음의 살을 섞었던 그들. 그리운 사람은 그리운 사람끼리 닮아있었다.
지난 21일 서울 홍익대 인근의 한 카페. 독일에 머물고 있는 시인 허수경(47)씨가 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독자와 만난 자리였다. 허씨의 새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을 발행한 문학동네가 신작 시집 낭송회로 조촐하게 마련한 자리였는데, 30여평의 너르지 않은 곳에 60여명이 빼곡히 찼다. 빌어먹을,>
허씨가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1987)에 이어 1992년 <혼자 가는 먼 집> 을 내곤 훌쩍 독일로 떠났을 당시, 갓난 아이였던 20대 독자들도 상당수였다. 20여년의 시차에도 그들의 교감 전지는 이미 충전율 백 퍼센트 같았다. 한 20대 여성 독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친구가 없어서 여기도 혼자 왔다”는 그녀는 “제가 힘들어 할 때 후배가 선물해준 <혼자 가는 먼 집> 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다. 선생님의 시가 제겐 독도 됐고 약도 됐다”고 말했다. 혼자> 혼자> 슬픔만>
40대에겐 첫사랑을 만나는 듯한 애틋한 추억의 자리였다. 낭송회 공연을 위해 초대된 인도음악가 나무(본명 박양희)씨는 “스물 세 살 때 독한 사랑을 일찍 마무리하던 시절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는 주문처럼 나를 안아주던 구절이었다”며 “5년 정도 시인을 모셔 함께 공연을 하는 ‘포엠 콘서트’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허 시인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제야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나무씨가 허씨의 대표시 중 하나인 ‘기차는 떠나간다’를 처연한 곡조로 부르는 동안 어떤 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는 것처럼.
이미 20대 때 몸에 밴 슬픔의 정서를 빼어난 가락으로 뽑아냈던 허 시인은 그 자신이 타인의 가락까지 읊는 악기, 그것도 술에 취한 악기와 같았다. 그의 시에 술 취함의 정서가 그득하다 보니, “선생님 시를 읽으면 낮술이 먹고 싶어진다”등 술에 얽힌 웃음기 섞인 질문도 많이 나왔다. “(술 주정을 잘 한다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며 웃은 허씨는 “술병을 깨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이 술 취한 저를 데려가기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삶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독자들의 따뜻한 환대에 “과분하다”며 무척이나 쑥스러워한 허씨는 예전과 달라진 리듬의 신작 시집에 대해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은 6년 만에 나온 그의 다섯 번째 시집. “수다스러워졌다”는 그의 표현처럼, 희곡의 형식을 빌리기도 하고 에세이처럼 쓰여지는 등 다양한 형식의 장시들이 많다. 빌어먹을,>
고국을 떠나 독일 뮌스터대에서 고대근동고고학을 공부해왔던 그에게 고향은 이미 진주에서 문명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 확장됐던 셈이었다. 신작 시집은 그 고고학적 고향에서 태고적 사유를 담아 현대 문명을 들여다 본다. 이를테면 첫머리에 놓인 ‘나의 도시’는 문명을 쓸어가는 대홍수의 모티브를 담고 있으며, 표제작에 담긴 ‘차가운 심장’은 연민을 잃어버린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상징이다. 이런 테마를 풀어내자니 “시가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거창한 문명 담론을 푸는 것은 아니다. 시집은 그 특유의 리듬 속에서 문명의 끄트머리에 선 자의 쓸쓸함이 눅진하다. 허씨는 신작시‘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를 읽던 중에는 시에 담긴 어떤 기억 때문이었는지, 감정에 겨워 낭송을 중단했고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신형철씨는 “허 시인의 시가 아무리 길어져도 리듬이 살아있다”며 “머리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말에서 나오는 마음의 리듬이다”고 말했다.
20년 전의 시인을 기억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낯선 변화일 수도 있다. 허씨는 “보기에 헷갈리고 왜 이리 말이 많냐고 할 수 있겠지만, 다 읽지 못하더라도 5년 동안 천천히 읽어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2006년 박사학위를 받고, 지도교수와도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는 그는 31일 독일로 돌아가지만, 독자와의 만남은 좀 더 잦아질 것 같다. 그는 “애초 공부를 했던 것도 문학으로 다시 오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온전히 문학으로 돌아오려 한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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