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IBK투자증권의 신입사원 면접 시험을 보러 간 김모(30)씨는 입사 지원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원서에 구직자의 이름만 달랑 적도록 돼 있었던 것. 학력이나 어학 점수 등을 적을 곳이 없는 것은 물론 그 흔한 사진 한 장 붙일 곳도 찾을 수 없었다. IBK투자증권은 대신 '자기성취서'와 '추천서'를 면접 기초 자료로 활용했다.
4,800여명의 지원자 중 최종 합격자는 25명. 이 가운데 이른 바 명문대 출신은 단 4명에 불과했다. 전공 분야도 금융 뿐 아니라 교통공학, 의상학, 화학 등으로 다양했다. 이형승 IBK투자증권 대표는 "기업에겐 구직자의 이력보단 그 동안 구직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이를 극복해 왔는 지 보여주는 진짜 스토리가 중요하다"며 "이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위해 학교나 점수는 없앤 채 자기추천서와 추천서 위주로 면접을 봤다"고 밝혔다.
최근 채용 시장에서 '스펙'무용론이 확산되고 있다. 스펙이란 제품이나 자동차의 크기와 성능을 뜻하는 '사양'(仕樣ㆍspecification)에서 나온 말로, 취업 준비생 사이에 출신 학교와 학점, 외국어 성적, 자격증 소지, 해외 연수나 인턴 경험 유무 등을 종합해 표현한 것이다. 취업난이 심해지며 얼마나 화려한 스펙을 쌓았느냐 하는 것이 채용의 결정 요소인 양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흐름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미 스펙이 결코 절대적인 채용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다만 최소한의 입사 지원을 위한 기본 조건에 국한해 스펙을 참조할 뿐이라는 것. 실제로 SK텔레콤은 입사 전형 과정에서 스펙을 가린 채 자기소개서 중심의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지원자가 이미 비슷한 스펙으로 무장, 더 이상 변별력도 없는 상황이다. 또 스펙이 화려한 지원자와 그렇지 않은 경우, 실제 업무에선 큰 차이가 없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채용포털 인크루트가 최근 대기업 1년차 직장인 1,000여명의 이력서와 신입 구직자 13만여명의 이력서를 분석한 결과, 구직자와 대기업 신입사원의 스펙에선 차이점이 거의 없었다. 단 어학 부분에서만 근소한 차이점이 발견됐다.
또 외국어 점수와 실제 어학실력과는 큰 상관이 없고, 학점 '인플레이션'도 심해 신뢰도가 낮다는 게 채용업계 전문가의 일반적인 지적이다.
특히 스펙은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중시하는 애사심을 평가하는 데도 적합하지 않다. A사의 인사 담당자는"화려한 스펙 보단 오랫동안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을 때 회사와 개인의 만족도가 모두 높고 근무 성과도 좋았다"고 말했다. B사의 인사부장도 "스펙이 높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이직할 가능성도 크다"며 "이는 회사 입장에선 그 만큼 위험(리스크)를 떠 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활성화하면서 오히려 고전적인 '입소문'이 신입사원 채용에서 중시되고 있다. 인크루트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 인사담당자의 5명 중 1명(19.5%)은 구직자의 SNS에 접속해 본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 교수나 사내 추천 등을 통해 채용을 늘리는 것도 이런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는 게 채용업계 설명이다.
현대ㆍ기아차 관계자는 "신입사원 채용에선 사실 도전적인 경험을 통해서 개인적 발전을 이뤄낸 적이 있는 지를 가장 비중있게 본다"며 "단순히 수치상으로 보이는 스펙은 중요한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신진숙 인크루트 책임은 "채용 시장에서 일관된 경험을 통해서 전문가로 커 나갈 가능성을 보여주는 스토리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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