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 이분법적 접근할 사안 아니다"
복지 논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혜택을 주는 '보편적 복지'냐 아니면 저소득층 지원에 집중하는 '선택적 복지'이냐, 또 무상이냐 유상이냐….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불문하고 서로 각을 세워 상대방 정책을 정략적으로 헐뜯고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타협하기는커녕 복지 의제 선점을 위해 피상적이고 대립적인 구도로만 몰아가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이런 소모적 논쟁이 현상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해법 모색을 가로막을 뿐이라며 합리적 대안 제시를 위한 생산적 토론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일보가 24일 보건사회연구원과 공동으로 이념 성향의 균형을 맞춰 구성한 학계, 시민단체, 정부부처 복지 전문가 6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정치권의 쟁점인 보편적ㆍ선별적 복지가 '선택의 문제인가'라는 질문에 '전혀 아니다(-5)'와 '매우 그렇다(5)'를 기준으로 대다수 전문가가 '양자택일할 사안이 아니다(평균 -2.0)'라고 답변했다. 보수(-1.6) 중도(-1.8) 진보(-2.4) 성향과 관계없이 모두 정치권의 이분법적 접근을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복지 논쟁의 비현실성 문제도 제기됐다. 정치권 논쟁 중 '구체적 재원 조달 논의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보수(-3.0) 중도(-2.4) 진보(-0.8)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평균 -2.0로 '아니다'는 쪽이 다수를 이뤘다. 이와 함께 '정치권이 제도에 대한 이해 없이 정략적으로 접근한다'(2.2) '양자를 지나치게 대립구조로 몰아간다'(2.4) 등에 대해서도 '그렇다'에 무게를 뒀다. "보편적ㆍ선별적 복지가 아닌 맞춤형 복지로 가야 한다"(이영 한양대 금융경제학부 교수)와 "복지 재정을 누가 부담하는지에 논쟁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김정호 자유기업원장)는 얘기에 정치권이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또한 현재 시급한 건 복지 담론 투쟁이 아니라, 튼튼한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소득과 노동시장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라는 데 방점을 찍었다. 10년 내 발생할 가장 심각한 위기로 전문가들은 소득불평등(34.4%)과 노동시장 양극화(29.5%)를 꼽았다. '임금과 고용'의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지 않고는 제대로 된 복지를 논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10년 이후 닥쳐올 위기에 대해서는 과반수 이상(63.9%)이 저출산ㆍ고령화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노대명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 문제는 건설적 논의가 시급한 사안들이 정치 쟁점화하면서 합리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못하는 것"이라며 "복지 근간인 양극화 해소를 비롯해 지출과 재원조달 등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박기수기자 blessyou@hk.co.kr
이왕구기자 fab4@hk.co.kr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성장만으론 불평등 해소 못해" 진보·보수 한목소리
복지논쟁에 관한 설문조사에 참여한 대다수 전문가들은 정치권이 편가르기식 복지 논쟁을 접고 건설적 대안을 찾기 위한 논의를 하루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의 입장을 쟁점별로 살펴봤다.
경제성장이 만능 아니다
통상적으로 경제성장을 통해 얻은 과실을 사회구성원에게 골고루 나눠 줌으로써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게 성장론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소득 불균형은 심화하고 850만명이 넘는 비정규직 근로자는 줄지 않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경제학 전공자가 절반(51.2%)이 넘었음에도 성장만능주의를 경고했다. '성장이 곧 불평등을 해소하느냐' 는 질문에 전문가들은 보수(-1.0) 중도(-2.8) 진보(-4.4) 등 이념 성향에 따라 강도는 다르지만, 평균 -2.8(-5:전혀 아니다, 5:매우 그렇다)로 답해 성장이 불평등 해소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분배보다 성장에 경제정책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는 질문에도 보수(0.4)를 제외하곤 중도(-1.2)와 진보(-2.6) 모두 '그렇지 않다' 고 답하는 등 평균적으로 부정적 인식(-1.2)이 우위를 점했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성장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 성장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양극화 해소가 성장에 기여하는가'에 대해 보수(-0.4)가 다소 부정적 입장이었지만, 중도(0.4)와 진보(2.6)는 '그렇다'고 답했다. 전병유 한신대 교양학부 교수는 "재분배(복지) 이전에 생산과 노동시장의 불평등한 분배문제부터 인식해야 한다"며 양극화 해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생산적 논의 절실하다
전문가들은 정치인들이 의제 선점을 위해 자극적인 공약이나 대안 없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복지공약이 일관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보수(-3.8) 중도(-3.2) 진보(-2.2)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평균 -3.0으로 나와 부정적 답변이 대세를 이뤘다. 정당의 고유한 정책은 실종되고 정권이 바꿀 때마다 다른 대안을 내놓고 있다는 얘기다. 아울러 '복지 정책이 정책적ㆍ이론적으로 충분히 검토돼 제시되느냐'는 물음에도 보수(-4.2) 중도(-4.0) 진보(-3.0) 모두 부정적으로 답해 설익은 정책 남발을 비판했다.
또 정치권이 '국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대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성향과 관계없이 '그렇지 않다'(-2.0)고 답했다. 정치권의 복지 공약이 인기영합주의로 빠져든 것은 표를 의식해 현세대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행태가 지속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 판단이다. 문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투표권이 없는 후손의 이익을 대변할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출 늘리려면 재원 논하라
이념 성향을 떠나 전문가들은 앞으로 복지지출 확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한 재원 논의가 필수적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했다. 재원조달 방식에 대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한 과세기반 확대가 필요하다는 데 대해 보수(1.6) 중도(1.4) 진보(2.6) 모두 공감을 표시했다. 반면, 부자 증세 등 누진적 조세체계 강화에 대해서는 보수(-0.6) 전문가가 다소 반대 의견을 보인 반면, 중도(0.2)와 진보(2.8)는 찬성 입장에 섰다. 사회보장세 등 복지지출을 위한 목적세 신설에 대해서는 진보(0.4) 외에는 보수(-0.4)와 중도(-0.8) 모두 약하나마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현 복지지출 수준이 적정한가'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보수 성향의 전문가(0.0)를 제외하면 중도(-1.8)와 진보(-4.0) 모두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답했다. 특히 빈곤층에 대한 지출 확대는 보수(2.0) 중도(1.8) 진보(2.6) 모두 한목소리로 지지했다. 반면, 중산층에 대한 지출 확대는 보수(-1.4)와 중도(-0.8)가 부정적 입장을 보인 반면, 진보(1.0)만이 찬성했다.
복지와 일자리의 양립에 대해서는 같은 목소리를 냈다. 복지와 고용의 연계 강화에 대해 보수(1.6), 중도(2.0), 진보(2.6) 모두 공감을 표시했다. 이른바 퍼주기식 지출은 예산낭비만 불러온다는 공통된 판단인 셈이다. 조국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일자리 나누기가 복지확대와 함께 추진될 때만 지속가능한 복지정책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형 모델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이념성향을 떠나 우리나라 특성에 맞는 복지 모델을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복지 모델을 묻는 질문에 '한국형 모델' 이라는 답이 72.1%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북구 사민주의(11.5%) 대륙 조합주의(9.8%) 영미 자유주의(4.9%) 등이 뒤를 이었다. 보편적 복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식 모델이 유일하지 않은 것처럼 선별적 복지를 내세우는 영미 자유주의 모델도 우리가 좇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북구형과 영미형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을 버리고, 우리 현실에 적합한 한국적 복지국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고 밝혔다.
박기수기자 blessyou@hk.co.kr
이왕구기자 fab4@hk.co.kr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이번 조사의 특징
이번 설문조사는 그간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와 달리, 복지정책 결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이에 영향을 미치는 전문가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복지논쟁에 관한 일반인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는 미디어를 통해 구조화된 정치권의 이분법적 시각이 상당부분 여과 없이 반영되는 경향이 큰 게 사실이다. 이에 비해 이번 조사는 복지 관련 전문가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복지논쟁이 간과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정치권이나 일반 독자들이 한국 복지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조사는 설문에 응답하는 전문가들의 이념적 성향이 고르게 반영될 수 있도록 표본을 설계했다. 이를 위해 한국일보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조사에 앞서 학계, 시민단체, 부처 등에 소속된 총 120여명에 이르는 전문가를 이념성향에 따라 적절히 조합하여 표본을 만들었고, 이중 설문에 응한 66명의 전문가를 자신이 답한 5가지 이념 성향('매우 진보' '다소 진보' '중도' '다소 보수' '매우 보수')에 따라 분류했다. 그 결과, 진보 성향의 전문가가 보수 성향의 전문가보다 5명이 많았으며, 그로 인한 분석결과의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 5명의 진보 성향 전문가를 뺀 61명(보수 21명, 중도 19명, 진보 21명)을 분석함으로써 좌우 균형을 최대한 맞췄다.
보건사회연구원 노대명 연구위원
김문길 선임연구원
●설문에 도움주신 분들 (66명·가나다 순)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 강신욱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강운경 고용노동부 임금복지과장, 강철희 연세대 교수, 고영선 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장,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상조 한성대 교수, 김선수 민변 회장, 김원식 건국대 교수, 김원종 보건복지부 보건산업정책국장, 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 김정관 기획재정부 사회정책과 과장,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김제락 고용노동부 산재보험과장, 김진욱 건국대 교수, 김창엽 서울대 교수, 김태일 고려대 교수, 김호기 연세대 교수, 김호섭 중앙대 교수,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 동훈찬 전교조 정책실장, 문진영 서강대 교수, 문형표 KDI 경제정보센터소장, 민경국 강원대 교수, 박능후 경기대 교수, 박종길 고용노동부 근로기준정책관, 방기선 기획재정부 복지예산과장, 사공진 한양대 교수,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 성창훈 기획재정부 미래전략과장, 손건익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 손호철 서강대 교수, 신광영 중앙대 교수, 안양옥 교총 회장, 유경준 KDI 선임연구위원, 윤진호 인하대 교수, 이규식 연세대 교수, 이봉주 서울대 교수, 이삼식 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사회연구실장, 이상돈 중앙대 교수, 이성규 서울시립대 교수, 이영 한양대 교수, 이영호 보건복지부 보육정책관, 이재흥 고용노동부 노동시장정책관, 이정우 인제대 교수, 이찬근 인천대 교수,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이학영 한국YMCA 사무총장, 이헌 시변 대표, 임동수 민주노총 정책실장, 임종규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국장, 전병유 한신대 교수, 전삼현 숭실대 교수, 전성인 홍익대 교수, 정기혜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조정실장,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국장,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조국 서울대 교수, 조재정 고용노동부 노사정책실장, 최경수 KDI 선임연구위원, 최균 한림대 교수, 최영기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최희주 보건복지부 인구아동정책관, 하성 기획재정부 미래전략정책관, 홍경준 성균관대 교수, 황덕순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66명ㆍ가나다 순)
■ 우리 복지 현실은
한국의 복지관련 지표들은 어느새 안 좋은 것은 대부분 최상위권, 좋은 것은 대부분 최하위권이다. 팍팍하고 경쟁적인 삶 속에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절대적ㆍ상대적 빈곤율 모두 해를 거듭할수록 나빠지고 있다.
우선 벌이가 적어 생활조차 힘든 이웃이 10명 중 1~2명이다. 2009년 기준 14.4% 가구가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벌이로 생활하고 있다. 2003년 11.2%였던 것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실제 빈곤율은 공식 지표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지표에는 가난한 인구가 많은 농어민이 제외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06년 가계조사부터 절대적 빈곤율에 1인 가구를 포함시켜 전국가계를 대표한다고 표방하고 있지만, 여전히 농어민 가구가 제외돼 있어 실질적으로는 전국가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소득불평등, 양극화 정도를 보여주는 수치들 역시 높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소득하위 10% 가구가 벌어들이는 소득은 전 가구 소득의 0%대로 떨어져 충격을 주고 있다. 2003년 소득하위 10%는 전체 가구소득 중에 1.5%를 차지했는데, 2009년에는 0.85%로 떨어졌다. 전체가구의 소득이 총 100만원이라면 하위 10% 가구의 소득을 합해도 8,500원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면 상위 10%는 24만6,800원(24.68%)을 벌었다.
꼭 최하위 계층으로 축소하지 않더라도 전반적인 상대적 빈곤율도 증가 추세다. 가처분소득 기준으로 순서를 매겼을 때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소득(중위소득ㆍ평균과는 다름)의 절반도 못 버는 가구(중위 50%)가 2006년 전체의 16.3%에서 2009년 16.8%로 늘었다. 양극화를 보여주는 이런 통계 역시 농어가 가구는 제외돼 있기 때문에 실제 양극화 정도는 더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각국마다 최저생계비의 개념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 빈곤율을 비교하는 수치는 없지만, 상대적 빈곤율을 비교하는 국제수치는 있다. 이를 토대로 분석해보면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중위 50% 기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 중에 여섯 번째로 높다. OECD 국가들 중에서 소득불평등이 매우 심한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OECD 통계는 국가마다 비교연도가 조금 차이가 있어서 최신자료가 200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현재 한국의 양극화 순위는 이보다 더 높아졌을 수 있다.
자살률을 국제적으로 비교하면 우울해질 정도다. 한국의 자살률은 2위와 큰 격차를 유지할 정도로 OECD 국가들 중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2009년 10만명당 자살자가 28.4명으로 1위였으며, 20명이 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반면 가정이, 그리고 개인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지지해 줄 수 있는 사회안전망, 즉 사회적 지출 수준은 비교 통계가 있는 OECD 35개국 중에 34위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복지지출이 7.5%(2007년)에 불과, 최하위인 멕시코 다음으로 낮다. 복지지출이 20%대 후반을 차지하는 상위권 유럽국가들과는 큰 격차다. 실제 차상위계층(최저생계비의 120% 이내 소득자)의 규모는 240만명으로 추산되지만 제대로 파악조차 안되고, 연락이 끊긴 부양가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비수급빈곤층이 103만명에 이르는 것이 한국 복지의 현실이다.
빈곤, 양극화를 해결하는 데 복지만이 능사는 아니라 해도, 최후의 보루(堡壘)인 복지가 탄탄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진국인 될 수 없다는 것을 위의 통계들은 보여주고 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한국의 복지정책사
각종 사회복지제도의 도입과 확대는 당시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박정희 정권은 정권 초기인 1961년 군사원호법, 생활보호법, 재해구호법 등을 무더기로 입법하는 등 사회복지제도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혜택대상이 주로 공무원, 군인, 교사들로, 사회복지제도를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회보장제도인 건강보험(의료보험)이 도입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63년이지만 당시에는 국가가 재정을 부담한 것이 아니라 직능조합중심의 임의가입 형식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 정권은 상대적으로 복지제도 확장에 무관심했지만 1976년 보험수가의 일부를 정부가 부담하는 방식으로 의료보험법을 전면 개정함으로써 오늘날 건강보험체계의 기틀을 마련했다.
군사정권은 사회복지제도를 정권의 위기극복 수단으로 사용하는 행태를 거듭했는데 1981년에는 아동복지법, 장애인복지법 등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복지법안이 제정됐다. 이는 전년에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이 도시빈민, 영세자영업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에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의 대응책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1987년 민주화항쟁은 복지수요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를 크게 높였다는 점에서 사회복지제도의 전환을 촉발한 사건으로 꼽힌다.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던 노태우 정권은 최저임금제 도입(1989), 전국민 건강보험제도 실시(1989), 국민연금제도의 실시(1989) 등 진보적 복지정책을 시행했다. 김영삼 정권기의 세계화 물결은 성장시대의 평생고용의 신화를 깨뜨렸고, 이는 사회복지제도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유도했다. 1995년의 고용보험 도입은 이런 경제ㆍ사회적 맥락에서 이뤄졌다.
IMF 구제금융체제로 상징되는 외환위기, 이전 정권보다 상대적으로 복지를 중시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출범은 잔여적ㆍ선별적 성격의 기존 사회복지정책을 보편적 성격의 복지정책으로 진일보시켰다.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국민연금 등 4대 사회보험이 이 시기에 제도적으로 완비됐으며, 빈곤층에 대한 한시적 긴급지원제도로 운영됐던 생활보호제도의 한계를 보완, 실질적 생계보장을 도모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2000)도 이때 도입됐다.
성장을 기치로 내걸고 집권한 현 이명박 정권은 이전 정권에서 추구했던 준보편적 현금지원제도를 지양하고, 고용창출과 연계시킨 사회복지제도 도입으로 복지정책의 방향전환을 꾀하고 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기고/ "정부 신뢰 낮아 모델 선택 더 어려워"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다. 지구상의 국가들의 국민행복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1인당 GDP가 크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결과를 내놓고 있다. 경제적 요소 이외에도 사회적ㆍ종교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신적 요인들이 행복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이른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행복도가 높다 해서 네팔이나 방글라데시의 국민과 같이 살아가자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정보가 열리고 개방되고 문명화된 국가에서는 물질적인 절대기준에 의하여 행복이 결정되기보다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상대적 기준에 의하여 행복수준이 결정된다.
선진국들의 복지선택의 스펙트럼은 넓다.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등의 국가처럼 고복지ㆍ고부담을 선택하고 있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영국, 미국, 일본 등과 같이 저복지ㆍ저부담을 선택하고 있는 국가도 있다. 또한 같은 고복지ㆍ고부담 국가라 해도 북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사회보험제도 중심으로 중첩적인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 독일 같은 국가도 있다. 그러나 국가간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부담가능한 선에서 복지수준을 합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담이 크든 작든 복지모형의 선택은 어렵다. 특히 고복지에 저부담의 선택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고복지ㆍ고부담은 합의가 어렵고 저복지ㆍ저부담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선진국이나 우리나 세금 내는 것을 반기는 사람은 없고, 역으로 부담만 없다면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도 거의 없다. 실제로 이와 관련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복지혜택은 원하면서도 그에 상응한 부담에는 부정적인 답을 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국민과 같이 국가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경우는 신뢰가 높은 국가들에 비해 복지모형의 선택이 쉽지 않다. 고령화의 급속한 진행과 경제성장의 둔화는 문제해결책을 도출하는 데 더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복지와 관련된 논쟁은 뜨겁다. 국민합의만 도출할 수 있다면 복지논쟁은 치열할수록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이나 우선 순위의 논의가 아닌 담론 차원의 상호 부정적인 이전투구는 사회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복지논쟁의 전초전은 이제 끝내고 실현가능하고 책임성 있는 대안을 가지고 진지한 국민토론이 활성화되어야 할 시점이다. 미래의 한국 복지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설득과 동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한국적 복지모형이 만들어지고 대한민국 공동체는 성숙하게 될 것이다.
김용하 한국보건사회硏 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