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서 나무꾼 4형제를 만나 작전은 결국 실패했지만 나는 자유를 알게 됐다."
21일 오후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경기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1·21 안보견학장. 녹이 잔뜩 슬어 붉게 변한 철조망을 1ㆍ21사태의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70ㆍ사진) 서울 성락교회 목사가 주름진 손으로 움켜잡았다. 1968년 1월 17일 밤 김 목사를 포함한 무장공비 31명이 남침을 위해 자른 바로 그 철조망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 소속이었던 김 목사는 '육군 하사 김창수'라는 한국군복을 입고 이곳을 통과했다.
이날 육군 25사단이 1ㆍ21사태를 상기하기 위해 마련한 'Remember 1ㆍ21' 행사에 초청된 김 목사는 43년 전 자신이 침투했던 지역을 25사단 장병들과 함께 방문하며 당시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김 목사와 장병들은 안보견학장에 이어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의 임진강 기슭을 찾았다. 이곳은 김 목사 일행이 서울로 가기 위해 임진강을 건넜던 지점. 그는 "그때도 기온이 영하 20도 가까이 떨어지는 추운 날씨였다"며 "얼어붙은 임진강을 흰색 모포를 덮고 건넜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 목사는 "실미도라는 영화를 보니 내가 훈련한 것의 반밖에 안됐다"며 북한군의 훈련 강도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어 일행이 도착한 곳은 파주시 파평면 파평산(495m). 민간인통제선 바로 옆에 위치한 파평산은 당시 김 목사 일행이 민간인의 눈을 피해 산길을 따라 서울로 잠입했던 시작 지점이다. 하지만 김 목사 일행은 법원리 인근에서 나뭇꾼 우씨 4형제를 만나게 되고 이들의 신고로 군경이 비상근무에 들어가면서 청와대 습격 계획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교본대로 4형제를 살해하고 묻은 뒤 작전을 수행해야 했지만, 대원 모두가 얼어붙은 땅을 팔 체력이 없어 풀어줬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들 때문에 작전은 실패하게 됐지만 결국 나는 자유를 알게 됐고 자유를 지키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김 목사 일행은 우이령과 북악산을 차례로 넘어 1월21일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의 세검정고개까지 접근했다. 창의문을 통과하려던 이들은 경찰의 검문을 받았고 이어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김 목사만이 유일하게 생존했으며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양주·연천=김창훈기자 ch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