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풍광을 대표하는 야자나무는 널따란 평야에 훌쩍 큰 키로 서있다. 코코넛야자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야자의 종류는 수십 가지에 이르고 그 중 하나가 사탕야자이다. 사탕야자 나무는 키가 20~30m에 이를 때까지 빨리 자란다. 가지가 없고 깃꼴의 겹잎 형태를 취한다.
캄보디아인들은 자기 땅의 사탕야자 나무에서 설탕을 얻는다. 사탕야자 꽃이 피기 전에 꽃 이삭을 잘라 얻은 즙으로 야자 술을 만들고 발효 전에 석회를 넣어 설탕을 만든다. 잎은 지붕과 벽의 재료로 쓰고 줄기는 잘게 쪼개 마루를 깐다. 나무줄기의 단단한 섬유소로 새끼를 꼬아 끈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킬링 필드의 도구로 쓰여
사탕야자 나무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애증이 교차하는 존재다. 농촌이나 도시의 주상가옥(pole house) 정원에는 바나나나 야자나무가 항상 친구처럼 서있다. 그러나 사탕야자 나무는 집 가까이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탕 나무와 코코넛 나무와 종종 혼동되는데, 결정적인 차이는 몸통의 모습에 있다. 코코넛나무 몸통은 말끔한 반면, 사탕나무 몸통은 거칠고 억센 고엽으로 뒤덮여 있다. 사탕야자는 캄보디아 사람들이 겪은 전쟁과 폭력의 끔찍한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사탕야자 나무의 몸통을 감싸고 있는 잎새 밑부분은 톱날 같은 모습을 띠고 단단하며 예리하다. 많은 캄보디아인들은 1970년대 중반 크메르루주가 민간인을 학살할 때 이를 이용하여 목을 베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린 아이를 사탕나무에 던져 거친 잎새 밑에 찔려 죽게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킬링 필드는 1975년에서 1979년까지 군벌 폴 포트가 이끄는 무장단체 크메르루주가 저지른 학살 만행을 말한다. 원리주의적 공산주의 단체인 크메르루주는 3년 7개월간 전체 인구 700만 명의 15~20%를 학살했다. 한 여자고등학교는 S-21(Security office-21)이라는 수용소로 쓰였다. 이곳에는 한번에 1,000~1,500명이 수용되었다. 1979년 1월까지 최소 1만 4,000명이 투옥되었는데, 단 7명만이 생존했다고 한다. 여기가 당시 고문 도구와 피살자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 투슬렝 박물관이다.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인들의 삶을 철저히 붕괴시켰다. 일거에 모든 도시를 비우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시장과 화폐 유통을 정지시켰다. 공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수십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농민이 되어야 했다. 가족은 흩어지고 파괴되었다.
캄보디아인들의 킬링 필드 기억은 크메르루주 학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킬링 필드는 캄보디아 영토 안에서 벌어진 베트남전이다. 캄보디아 변경지역을 베트남 공산게릴라들의 배후기지로 간주한 미국은 캄보디아 폭격을 결심했다. 공산 게릴라 세력을 견제하려는 캄보디아 지배층은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1969년 3월 18일, 드디어 미군의 폭격이 개시돼 캄보디아 변경과 농촌 지역은 B-52 폭격으로 인한 참상이 벌어졌다.
미군 폭격과 독재정권은 미약한 존재였던 크메르루주를 급속히 강화시켰다. 크메르루주에 입대하는 농민이 급증했으며 이들은 도시를 고립시켰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켰으며, 보복과 경제 악화, 학살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산 베트남과의 충돌이 표면화되었다.
종속과 빈곤의 그림자
여기에는 끊임없이 적을 설정하려는 군사적 모험주의, 예로부터 이어져온 베트남과의 갈등, 중국과 소련의 세력 경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베트남은 크메르루주의 경솔한 국경 침범을 빌미로 1978년 크리스마스를 기해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했다. 베트남군은 이후 10년간 캄보디아에 주둔했으며, 철군 후에도 강력한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전쟁은 일단 벌어지면 쉽게 끝나지 않는 법이다. 캄보디아의 사탕야자 나무는 평화로운 듯 서있지만, 대량 학살의 기억과 종속과 빈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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