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필립 로스 지음ㆍ정영목 옮김문학/동네 발행·248쪽·1만1000원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필립 로스(78)가 국내에 정식 소개된 것은 2009년 번역된 <에브리맨> (문학동네 발행)을 통해서였다. 50여년의 작품 활동 동안 50여편의 장 ㆍ단편 소설을 쓰며 퓰리처상 펜포크너상 등 미국 주요 상을 받았고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거장치고는 뒤늦은 상륙이었는데 그의 진가가 이제야 국내에도 알려지고 있다. 에브리맨>
<울분> 은 국내에서 정식으로 번역된 그의 네 번째 작품. 초기 대표작인 <포트노이의 불평> <컬럼부스여, 안녕> 등도 조만간 소개될 예정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듯 지난해 8월 나온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새물결 발행)는 국내 출판사 간 경쟁 속에서 계약 분쟁에까지 휩싸였다. 나는> 컬럼부스여,> 포트노이의> 울분>
기왕 소개된 그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도 2008년 발표된 노년기 작품 중 하나지만 대학에 갓 입학한 19세 청춘이 겪는 격정과 분노를 칼날처럼 휘몰아치게 그리는 70대 작가의 흡입력이 놀랍다.
시대적 배경은 6ㆍ25전쟁이 발발하고 매카시즘이 몰아치던 1950년대 초. 작가의 젊은 시절과 일치하지만 그렇다고 노작가의 회한 어린 회고작쯤으로 여겨선 안 된다. 모범생이던 주인공 마커스가 미국 중동부의 작은 대학에서 보수적 관습에 부딪혀 종내 벼랑 끝으로 휩쓸려 가는, 분통 터질 듯한 상황은 지금 젊은이들의 처지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다. 동시대적 감수성을 명민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유대계 작가인 로스가 즐겨 다루는 주제 중 하나가 유대계 특유의 남 참견하기 좋아하는 공동체성과 고루한 율법주의 등과의 갈등인데 한국 사회 유교적 가부장주의와도 비슷한 측면이 있어 공감의 지평은 더욱 넓다.
주인공 마커스는 이른바 엄친아다. 착실하고 학구적이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이 청년은 그러나 대학 입학 후 룸메이트와의 사소한 다툼 등 우연들이 겹치면서 대학 당국의 눈엔 차츰 비적응 문제아로 비쳐진다. 특히 이 청년의 삶을 뒤흔드는 결정타는 매력적인, 그러나 위험천만의 여대생 올리비아다. 생각해 보라. 첫 데이트에서 약간의 스킨십 정도를 떠올리는 순진한 청년에게 도발적 성행위를 주저하지 않는 미모의 여성이 있다면. 더구나 그 여성이 부유한 이혼 가정에서 자라 알코올중독증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까지 입원한 경력이 있다면. 그 여성은 마커스에게 이해할 수 없지만 매혹으로 다가오는 욕망의 덫과 같다. 선택은 삶의 지뢰밭을 걷느냐, 유혹을 포기할 것이냐. 뜨거운 가슴을 지닌 청년이라면 가는 길은 뻔하다.
마커스 앞에 놓인 지뢰 중 또 하나가 6ㆍ25전쟁 징집이다. 학교에서 퇴학당하면 징집 유예를 받지 못해 사병으로 전선에 서야 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로 학교 당국에 몸을 낮춰야 할 판이지만 마커스는 우연과 오해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외통수로 몰려 결국 대학 당국을 향해 “씨X”이라는 말로써 폭발한다. 그걸로서 끝이었다. 모범생 마커스는 시종 정직했으나 그로 인해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
독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불만을 느낄 수도 있는, 문제적 대목은 마커스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게 단지 시대적 상황과 억압적 체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해한 삶의 근원적 우연성이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239쪽)는 작가의 마지막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이겠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