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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19> 난생 처음 탄 월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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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19> 난생 처음 탄 월급

입력
2011.01.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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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그게 웬만한 것일 때, 그 처음은 대단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했다. '첫 단추를 잘 끼워라'라는 속담도 있다. 최초가 갖는 단단한 의미가 이 말들에 어려 있다. 사랑도 첫 사랑은 영원하다고들 했다.

그러기에 첫 자가 붙은 말은 거의가 다, 독립된 단어로서 사전에 따로 실려 있다. 첫걸음, 첫길을 비롯해서 첫나들이, 첫날 밤, 첫마디, 첫말, 첫수, 첫정, 첫판 등. 자주 쓰이는 것만 골라보아도 이렇게 수두룩하다. 그 밖의 것들까지 합쳐서 사전에 올라 있는 첫 자 붙은 낱말만 해도 모두 해서 스무 가지를 넘고 있다.

그 낱말들이 모두 요긴하게 쓰이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굳이 하나만 고른다고 하면 나로서는 첫날밤을 내세우고 싶다.

누구나 알다시피, '첫날밤'은 신혼 초야다. 신랑신부가 낮 동안 혼례 치르고 난, 바로 그 날의 밤이다. 거기에는 각별한 까다로운 절차가 따르게 되어 있었다. 그저 이부자리 깔고 잠자리 같이 하는 정도는 아니다. 요식(要式)이라고 해도 좋을 수속을 밟아야 한다.

신랑이 먼저 신방에 들어가서는 신부를 기다린다. 혼례 치른 것도 신부 집이고 신방도 신부 집이다. 해서 신부가 주인으로서 신랑을 대접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한데도 신방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게 되어 있었다.

신랑이 기다리고 있는 신방에 드디어 신부가 들어선다. 한데 신랑을 등지고 돌아앉는다. 그러면 신랑도 돌아앉게 되어 있다. 이제 바야흐로 그야말로 마음도 하나고 몸도 하나이기 마련인데, 둘은 서로 짐짓 외면하고는 등지고 앉는다. 등졌다가 맞대면하는 것으로 둘의 하나 되기가 더 한층 단단해진다고들 믿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런 다음 비로소 마주 보고 앉는다. 그럴 때, 신랑이 도와서 신부를 맞보고 앉게 한다. 은밀한 방에서 둘은 비로소 맞대면하게 된다. 그러고 난 다음 신랑이 가벼운 입김으로 촛불을 끄고 첫날밤이 시작된다.

첫날밤은 이렇게 미리 정해진 대로 절차를 거쳐 나가게 되어 있다. 그러기에 첫날밤만큼, '첫'의 의미, 처음의 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비록 서로 정도는 다르다고 해도 거의 모든 처음들은 그리고 시작은 '첫날밤'에 버금갈 만큼 뜻 깊고 구실도 큰 편이다. 내가 내 생애 최초의 월급을 반세기에 더해서 20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6.25 전쟁이 터지고 대학들도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나는 그 피난간 대학을 3 년 동안 다녔다. 한데 대학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학교 당국과 교수들은 정성을 다해서 학생들을 위해서 이바지했지만 천막으로 지은 날림 가교사라서 그랬을까? 학사 진행은 엉성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3 년이 지나갔다. 6,25 전쟁 터지던 그 해 늦은 봄에 입학한 탓에 나는 당연히 3 학년이 되어 있었다.

가을 학기 들어서서 얼마쯤 지난 때였다. 그때까지 가끔 잔일을 거들었던 M 출판사에서 청이 들어 왔다. 새로 영한사전을 만들까 하는데, 도와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대학 강의에는 출석하면서 아르바이트 하듯이 일하면 된다고 했다. 대우도 매우 후하게 하겠다고 말을 덧붙였다. 내세우는 조건이 하도 좋아서 나는 기꺼이 응하기로 했다. 그래서는 대학 3학년 학생이 난데없이 출판사 정식 사원이 된 것이다.

일은 영한사전 만들기였다. 1953년 그 당시만 해도 우리말로 풀이가 된 영어 사전은 없었다. 누구나 일본말로 된 영일사전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 영한사전이 출판이 되면 그것은 국내로서는 최초의 것이 될 영예를 누리게 되어 있었다.

영일 사전 몇 가지, 영영 사전 두어 가지 등을 참고 자료로 삼아서 우리 대학생 신출내기 사원들은 일에 열중했다. 서로 같은 대학에서 이미 얼굴이 익어 있는 축까지 포함해서 모두 열 사람이었다. 다들 새로 얻은 아르바이트 겸한 직업이 영어 공부도 겸하게 된 것은 여간 다행한 아니라고들 좋아했다. 돈 벌고 공부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그러나 일이 쉽지는 않았다. 나중에 국내로서는 유일한 M 사의 '영한 콘사이스'를 만드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그 사전은 여전히 또 다른 M사에서 출간되고 있다.) 한 사람이 작성한 원고를 다른 두 사람이 감수하게 되어 있었다. 누가 작성하고 누가 감수하고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서로 돌아가면서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니 가령 A가 작성한 원고를 B와 C가 감수하자면 교정을 보고 수정을 가하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니 서로 격론이 벌어지고 그게 그만 자존심을 건 말싸움이 되기도 했다. 늘이다시피 사무실 안은 옥신각신했다. 싸움터 같았다. 일은 더 한층 힘들고 고되었다. 그래서는 다들 지치고 싫증을 내고 있는 판에 아니 이게 뭐람? 각자의 책상 위에 서무과 직언이 봉투를 하나씩 놓는 게 아닌가. 뭘까? 다들 궁금해 하는데 그가 소리쳤다.

"첫 월급입니다."

그건 생애 최초의 월급이었다. 아르바이트 치고는 매우 두툼했던 그 첫 월급봉투! 대학 등록금을 내고도 남는 액수였다. 아니 그보다 두어 배는 더 될 돈이었다. 우리는 그 봉투를 품에 품고는 다들 가슴 벅차게 새삼 일에 열중했다.

그것은 첫날밤과 함께 잊히지 않는 나의 '첫'으로서, 가슴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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