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2월1일 한국일보에 첫 출근을 했다. 근무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일본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해 국제적으로 시비가 일자 이를 참지 못한 장기영사장이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아마추어 무선단을 만들어 독도에 파견하는 구상을 했다.
무선단은 서울대 햄(HAM)서클로 결정되었고 이를 취재하기 위해, 후에 동아일보 논설위원, 한겨레신문과 MBC 사장을 역임한 김중배 사회부 기자와 함께 사장 앞에 섰다. 당시 장기영사장은 편집국장 옆에 책상을 펴고 결재를 하고 있었다. "잘 다녀오게. 독도 거기 추운 곳이야. 동상 걸리는 건 책임 안 져!" 말을 마친 장사장이 종이꾸러미를 두 개 내밀었다.
두툼한 장갑과 털모자가 들어 있었다. 장사장의 섬세한 배려가 가슴으로 와 닿았다. 다음날 조간 지방판에 나와 김중배기자의 얼굴 사진이 '아마추어 무선단 독도 특파'라는 기사와 함께 큼지막하게 실렸다. 다음날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포항에 도착, 밤에 경찰 경비정으로 옮겨 타 독도로 향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독도에 내릴 수 있었다. 바로 무선단의 교신이 시작되었다. "여기는 독도. 동경 00도. 북위00도." 낮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다시 교신을 하려는데 간간이 날리던 눈발이 폭설로 변하기 시작했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기 시작하니 공포감까지 밀려왔다. 동료인 김중배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정형, 내일 나가야겠어. 이러다 우리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무슨 일 당하겠어."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밖에 있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줄을 잡고 다녀와야만 했다. 다음날 눈을 뜨니 눈이 엄청나게 왔다. 무선단의 성화도 성화거니와 우리도 서둘러 경찰경비정에 부탁해 울릉도로 빠져 나왔는데 울릉도 또한 완전히 눈에 덮여 있었다. 집들이 전부 눈에 파묻혀 형체를 알 수 없었고 통행하는 주민들은 눈 속에 굴을 뚫어 길을 만들어 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는 굴이 마치 개미구멍 같았다. 주민들은 집 추녀 끝에 구멍을 내고 남자들이 다니는 굴을 숫굴이라 부르고 여자들이 다니는 굴을 암굴이라 불렀다. 36년 만의 최고 적설량이라 했다. 평화여인숙에서 2주일 가까이 갇혀 지내며 군수 집과 경찰서장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경찰에 사정하고 협박해 경비정 편으로 울릉도에서 나와 서울로 돌아오니 얼굴이 새까매져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했다. 햇빛에 반사되는 눈이 그렇게 따갑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다면 눈을 다 버렸을 것이다.
힘들었던 취재도 있었다. 그 해 겨울에서 봄으로 접어들 무렵이라 기억되는데 사회부에서 취재 요청이 들어왔다. 종로3가의 윤락녀들이 화장을 하고 방에서 대기하는 장면을 찍어 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취재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말 그대로 도둑 취재를 해야만 했다. 어느 누가 신문사 기자에게 "내가 윤락녀이니 사진 찍으시오"하고 허락을 하겠는가. 어쨌든 카메라를 메고 종로3가로 향했다. 이리저리 숨어서 사진을 찍어보려 했는데 아무리 몰래 찍는다 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원하는 장면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사진 취재에 실패를 하고 저녁에 이리저리 방안을 생각하고 있는데 묘수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빵떡모자에 카메라를 둘러메고 종로3가 홍등가를 거닐며 목청을 길게 뽑아 외쳤다. "기념사진 찍습니다~. 돌 사진이나 환갑 사진이요 ~. 헌 사진 복사도 합니다. 싸게 해 드리니 이 기회를 잡으세요~"어느 누가 봐도 완벽한 사진사의 목청이었다. 골목을 몇 번 왔다갔다하자 한 여자가 얼굴을 내밀고 "사진사 아저씨, 이리 와서 우리 좀 찍어줘요" 하는 게 아닌가! '옳지! 걸려들었구나" 쾌재를 부른 나는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와요. 어서" "어머, 사진사 아저씨 잘 생겼다. 호호" 윤락녀들이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떨며 한 마디씩 던져대기 시작했다. 온통 여자들에 둘러싸이니 화장품 냄새에 취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좀 돌아봐요. 잘 찍어 드릴게" "웃어야지, 그렇게 인상 쓰고 있으면 어떡하나. 그렇지 좀 옆으로 돌아앉아 보고" 너스레를 떨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 와중에도 후환을 없애기 위해 되도록이면 정면 사진은 피했다. 취재에 필요한 사진을 다 찍고 영수증을 달라는 말에 미리 준비한 'OK DP'점이라고 쓰인 용지를 내밀었다. 골목을 나설 때까지 뒤통수가 화끈거렸지만 그야말로 스릴 만점의 취재였다.
1962년 3월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다. 강원도 설악산 부근에 산불이 발생해 구선진 조종사와 함께 한국일보 비행기 HL22를 타고 긴급 출동을 했다. 이륙 후부?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도중에 돌풍을 만나 비행기 날개의 헝겊이 그만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동해안경비사령부에 SOS를 치고 군용비행장에 간신히 불시착을 했다. 당시 신문사에서 사용하던 경비행기는 군용의 질긴 천막으로 날개가 만들어졌는데 워낙 오래 된 터라 낡고 달아서 강풍을 만나니 그만 찢어져 버린 것이다.
강릉으로 나가 본사에 전화를 하니 회사에서는 행방을 알 수 없어 비행기가 추락한 줄만 알고 장례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장기영사장은 "자네, 정말 정범태인가? 자네가 맞아?" 하며 되물었다. "네. 접니다. 저 정범태입니다. 무사합니다" "그래 정말 다행이야. 아무 걱정하지 말고 거기 호텔에서 술이나 마시며 쉬면서 눈보라가 그치거든 천천히 상경하게" 장사장의 격려 덕택에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기자생활에서 벗어나 잠시 호텔에서 쉬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경향신문은 사회면 톱기사로 '취재 비행기, 설악산 산불 항공취재 중 행방불명'이란 판을 짜 놓고 수시로 한국일보에 확인 전화를 했다고 한다. 서울 연락이 조금만 늦었어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올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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