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의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한성백제의 몽촌토성이 고대의 시멘트인 강회로 쌓은 것이며, 이 기술이 한성백제의 멸망 직전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주장이 나왔다. 석회석을 800도 이상의 고온에 구운 생석회에 물을 부으면 엄청난 열과 수증기를 뿜으며 가루(소석회)가 되는데 여기에 진흙과 모래를 섞어 단단하게 만든 것이 강회다. 강회는 굳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석고 등을 섞어 빨리 굳게 만든 것이 시멘트다.
삼국시대 성곽 전문가인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 문화재지원팀장은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내는 최신호(76호)에 발표한 ‘한성백제의 증토축성에 대한 연구’논문에서 의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조에 나오는 증토축성(烝土築城ㆍ 흙을 쪄서 성을 쌓는다는 뜻)의 증토가 강회를 가리키는 것이며, 한성백제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이 몽촌토성을 보수할 때 강회가 쓰였다고 주장했다. 이 기록은 개로왕이 벌인 대규모 토목공사에 관한 것으로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해 증토축성케 하고 궁실 누각 보루 등을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고 씌여 있다.
심씨는 “당시 한반도에서 강회를 쓴 것은 백제가 유일하며, 이는 백제의 토목기술이 삼국 중 가장 앞섰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석회는 고구려 고분에도 쓰였으나 조개껍데기를 분쇄한 것이어서 강도가 약해 벽에 발랐을 뿐 벽을 쌓거나 지반을 다지는 등 건축용은 아니었고, 신라도 한성백제 멸망 후인 6세기까지 조개껍데기 석회를 썼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 학계는 흙을 찐다는 것이 어떤 기술이고 어디에 쓰였는지 알지 못했다. 1984년 구 숭전대(숭실대)가 몽촌토성의 동쪽 성벽 두 군데를 절개해 조사했을 때 땅속에 묻힌 성벽에서 석회가 포함된 판축(板築ㆍ널판지를 대고 흙을 다져 쌓는 것) 2개층을 확인했으나 석회의 정확한 성분 분석은 없었다.
심씨는 한국사에서 증토축성이라는 표현이 삼국사기의 이 기록뿐이고 중국사에서도 흉노족인 혁련발발의 대하왕조(407~431)가 쌓은 통만성 관련 기록에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강회 기술이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중국 역사서들에 따르면 대하왕조는 지금의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와 인접한 산시(山西)성 북부에 통만성을 “증토축성하면서 송곳이 1촌이라도 들어가면 그것을 만든 자를 죽여 함께 쌓았다.” 대하왕조가 북위에 의해 멸망한 뒤 증토축성 기술은 북위로 넘어갔는데 한성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해 468년 북위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 기술을 도입하게 됐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성백제는 당시로서는 첨단인 이 신기술로 472~474년 경 몽촌토성을 보수했지만 47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개로왕이 고구려 간첩인 승려 도림의 계략에 빠져 나라의 위신을 세운다며 도성 리모델링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는 바람에 국고가 거덜나고 국력이 쇠한 결과였다. 이후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해 명맥을 이어갔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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