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하자 한성 명문가 출신의 우당 이회영(1867~1932)은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 서전서숙 신흥무관학교 등을 설립해 독립운동에 나선다. 독립군 양성 기관이었던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한일 역사의 재조명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해 보는 국제 학술대회가 마련된다.
국학원 광복의병연구소는 12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동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한일 관계의 모색'을 주제로 한일 학술대회를 연다.
이덕일 한가람연구소 소장은 '한중일 평화공동체를 꿈꿨던 우당 이회영의 삶과 사상'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이회영의 한국형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조명한다. 이회영은 유교적 가치관이 팽배했던 당시 이서(吏胥ㆍ말단 벼슬아치)와 노비에 대한 차별적 언사를 경어로 바꾸고 적서의 차별을 없애는 등 신분적 속박과 봉건적 인습을 타파하려고 노력했다.
이 소장은 발표문에서 "개인은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지방자치체의 연합으로 국가를 구성하며 국가의 연합으로 국제기구를 구성하는데 각 국가는 완전한 독립과 평등권을 누린다는 게 이회영의 사상이었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1931년 이회영을 의장으로 결성된 항일구국연맹에는 중국인과 일본인도 가담했다"며 "그는 완전한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는 국제평화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던 평화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교수는 '일제하 항일운동 배경으로서의 단군의 위상'이란 발표문에서 "항일운동에서 단군은 저항의 총본산이자 정신적 동력으로서 큰 기여를 했다"며 "신흥무관학교 교가의 '우리 배달나라'란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신흥무관학교를 주도한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이동녕 등도 단군 정신으로 무장한 투사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정경희 국학학술원장은 이회영의 평화공동체론의 원천은 홍익사상이었으며, 이런 정신은 일본으로도 전해져 신도(神道) 전통 속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고 말한다.
한편 나카오 히로시 일본 교토가쿠게이대 객원교수는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인 역사 인식의 오류'란 논문에서 "후소샤(扶桑社)를 비롯한 몇몇 교과서에는 태평양전쟁을 제국주의 용어인 대동아전쟁으로 표기하고, 정신대로 징발된 한중 여성들의 피해 등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극히 간단하게 다루고 있다"며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교과서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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