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철지부(涸轍之鮒)'.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작은 물 속의 붕어 같은 신세를 말한다. 외물(外物)편에 나오는 얘기로,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취임사에서 서민금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했다. 고인 웅덩이에서 신음하는 붕어에겐 강물이 아니라 물 한 바가지가 더 절실한 것처럼, 위기에 놓인 서민금융 역시 긴급대책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은 노태우ㆍ김영삼ㆍ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대형 경제사건이 터질 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서 '대책반장'이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 긴급대책 마련은 그의 전공인 셈이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 그가 취임과 동시에 서민금융기관인 저축은행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에 칼을 들이대면서 관치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저축은행의 PF 부실 규모는 지난 연말 금융위원회의 비공개 보고를 받은 국회 정무위 소속 의원들이 "쇼킹한 수준"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로 심각하다. 부동산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지방 소형 저축은행 3곳이 이미 부실화했고, 중ㆍ대형 저축은행 5곳마저 파산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게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PF 부실은 금융권 최대 뇌관
정부가 고민해 온 해법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은행 보험 저축은행 등 업권 별로 분리돼 있는 예보기금(금융회사가 망할 경우 고객 예금을 5,000만원까지 보상해주기 위해 쌓아둔 돈)에 '공동계정'을 만들어 저축은행 부실을 메워주는 방안이다. 또 하나는 부실 규모가 큰 대형 저축은행을 시중은행들이 인수토록 하는 것이다.
은행ㆍ보험권은 완강히 저항했다. 공동계정안은 남의 부실을 전가하는 것이며, 부실 저축은행 인수 또한 은행 건전성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런데 김 위원장이 3일 취임하자마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우리 KB 등이 "대형 금융회사들도 금융시스템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저축은행 인수 의사를 밝힌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속내가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팔 비틀기가 시작됐다" "역시 관치의 화신답다"는 볼멘 소리들이 흘러나오니 말이다. 대통령의 친구와 측근들이 수장으로 있는 우리 KB 하나 등 금융지주회사들이 당국의 정책 방향에 코드를 맞춘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저축은행 부실을 떠넘기려 한다는 은행권의 반발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금융당국의 감독 실패와 저축은행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책임 추궁이 우선인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PF 부실이 저축은행 업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마냥 방치할 경우 은행권으로 전이돼 금융시장 전체의 위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저축은행의 주고객은 신용등급 7등급 이하의 서민들이다. 저축은행 부실의 상당 규모는 은행ㆍ보험권이 외면해 온 저신용자들의 금융 수요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사회적 비용의 공동 부담이라는 차원에서도 은행권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시중은행들 또한 10여 년 전 대규모 공적자금을 수혈 받아 부실을 털어내고 외환위기를 벗어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시장 안정을 위한 관치는 당연
관치를 무조건 옹호할 생각은 없다. 정권과 관료들의 이익을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는 관치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대통령의 측근을 민간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로 심기 위해 '감독기능'이라는 칼을 휘둘렀던 게 대표적이다. 은행권의 주장처럼 금융당국의 PF 부실 감독 실패와 저축은행 업계의 모럴해저드도 따져봐야 한다. 그렇다고 시장의 안정을 지켜야 할 관의 역할까지 부인해선 안 된다.
김 위원장은 취임 후 첫 일정으로 그제 서울 시흥동의 재래시장을 찾아 서민금융 현장을 점검했다. "금융은 국민 경제의 혈맥인데, 동맥과 정맥 등 큰 핏줄도 중요하지만, 서민금융기관처럼 실핏줄의 기능도 중요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PF 부실은 은행과 달리 수익모델이 마땅찮은 저축은행 업계가 무리한 고금리 수신 경쟁에 나섰다가 벌어진 일이다. 이번 기회에 서민금융기관들이 중소기업과 서민들 대상으로 본연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마련해주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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