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를 찾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많은 정초, 한겨울 적막함 속 혼자임을 느끼고 싶어서다.
백제 마지막 123년간의 도읍지였던 부여. 그 찬란했던 역사에 비해 지금의 풍경은 허망하다. 그저 퇴락한 조용한 읍내의 모습이다. 유홍준의 는 부여를 ‘인생의 적막을 느끼면서 바야흐로 적조의 미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중년의 답사객에게 제격인 곳’이라고 했다. 그 책 안에 빌려다 놓은 육당 최남서의 글 에선 ‘때를 놓친 미인같이, 그악스러운 운명에 부대끼다가 못다한 천재자(天才者)같이, 대하면 딱하고 섧고 눈물조차 피어오릅니다. … 얌전하고 존존하고 또 아리땁기도 한 것이 부여입니다. 적막할 대로 적막하여 표리로 다 적막만한 것이 부여입니다’라고 부여를 말했다.
그 스산스러운 아름다움을 찾아나선 부여길이다. 한겨울 차가운 공기가 쓸쓸함을 더했지만 소복하게 쌓인 눈이 퇴락을 감추며 포근히 부여를 감싸고 있었다.
부여에 도착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백마강변 나성터에 세워진 신동엽시비다. 시인은 1930년 부여읍내 동남리에서 태어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곤 1969년 세상을 떠났다. 시비는 작고 이듬해 동료 문인들이 주머니를 털어 세운 것이다. 시비는 아담했다. 바로 옆에 우뚝 서있는 ‘반공순국애국지사추모비’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정도다. 음각된 시비의 글귀는 사선으로 내리쬐는 겨울빛에 더욱 도드라졌다. 시비에 새겨진 시는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화사한 그의 꽃/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로 시작되는 ‘산에 언덕에’다.
시인의 아련한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부소산성을 올랐다. 높이는 해발 106m에 불과하지만 부여의 진산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도 부여는 백마강을 천연의 참호로 삼고 부소산을 진산으로 삼아서 겹겹의 산성을 둘러 건설됐다. 부소산성 정문 인근이 왕궁이 있었던 곳이고, 이를 기준으로 남쪽에 관가가 이어지고, 그 남쪽 한복판에 정림사가 터를 잡았다. 다시 민가가 이어져선 더 남쪽에 인공연못인 궁남지가 조성됐다. 부소산에서 양쪽으로 뻗어내린 나성이 자로 잰듯 계획된 고도 부여를 둘러쌌다.
늦은 오후 부소산성의 산책로는 한적했다. 이리 휘고 저리 휘며 이어진 산책로는 편안하게 걸음을 안내한다. 산성의 곳곳엔 누정(樓亭)이 세워져 있다. 방어를 위한 목적과 함께 왕궁의 원림(園林)으로서 구실도 겸한 곳이다.
정문을 열고 들어서선 먼저 삼충사를 찾았다. 백제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그곳에 걸린 계백의 영정을 확인한다. 우락부락한 장군의 모습이다. 삼충사가 세워진 게 1957년이니 저 얼굴이 실제 계백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영정을 그린 화가는 왜 저 표정으로 계백을 그려냈을까. 잠시 화가의 머리 속을 더듬어본다.
서복사지를 지나 반월루에 올랐다. 부여읍내가 발 아래다. 읍내 너머론 백마강이 흐른다. 반월루의 지붕과 난간엔 흰눈이 쌓여있다. 그 흰 프레임 안으로 아늑한 부여를 조망한다.
부소산성의 하얀 눈길은 적막했다. 백제 멸망 이후 부여는 늘 이렇게 적막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다는 사자루. 백마강 바로 옆 벼랑 위에 서있다. 강 너머 둑에선 포크레인 소리, 덤프트럭 소리가 요란했다. 4대강 사업이다. 그만 부여의 적막이 깨져버렸다.
부소산의 최고 경승지인 낙화암으로 향했다. 삼천궁녀의 전설이 어린 낙화암 위엔 육각지붕의 정자 백화정이 서있다. 흰눈을 이고 노송 기암과 어우러진 풍광이 정갈하다.
낙화암 전망대에 서서 백마강을 굽어본다. 멈춘 듯 정한 강물 위로 이제 막 뉘엿 지려는 햇덩어리가 붉은 물감을 풀어댄다.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을 흠집내는 건 강물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4대강 공사현장이다. 부소산의 깎아지른 벼랑마저 흰 눈이 감싸 안았는데, 석양을 튕겨내는 포크레인의 실루엣은 흰 눈도 감추질 못했다. 해가 기울었어도 멈추지 않는 기계의 움직임. 지긋지긋한 쇳소리.
분단과 외세, 전쟁의 위협을 시로 끌어 안았던 신동엽 시인은 아주 오래 전 이렇게 일갈했다.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껍데기는 가라’에서)
부여=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정림사탑 궁남지… 검소한 백제 미학 오롯이
부여는 크지 않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한 멋들이 넓지않은 부여 곳곳에 숨어있다.
정림사지가 자리한 곳은 부여읍 중심. 이름 그대로 정림사란 절이 있던 자리다. 지금 절터엔 석탑과 복원된 강당 건물, 연못, 그리고 정림사지박물관이 들어서있다.
부여에 들렀을 때 이곳을 빼먹으면 안되는 것이 바로 정림사지가 품고 있는 오층석탑(국보 제9호) 때문이다. 백제의 우아한 아름다움의 표본이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를 지닌 석탑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에서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탑은 엘리건트하며 노블하며 그레이스한 우아미의 화신이다’고 적고 있다. 그는 ‘정림사탑이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 덧붙였다.
이 탑은 국내 모든 석탑들의 어머니격이다. 나무탑을 흉내 내던 이전의 돌탑을 벗어나 돌의 성질을 그대로 살려내 이뤄낸 돌탑의 전형이다. 허허로운 절터에 홀로 솟은 탑신. 탑에 바싹 다가가 올려다 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지붕돌들이 층층이 겹쳐진다. 그 끝자락에서 슬쩍 치켜오른 지붕돌. 탑이 하늘을 들어올리는 느낌이다.
오층석탑 뒤 복원된 강당 안에는 키 큰 석불이 모셔져 있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08호)이다. 돌로 된 중절모를 쓴 듯한 멋쟁이 석불이다. 탑은 백제때 지어졌지만 석불은 고려때 것이다. 고려때 중창불사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석불의 머리와 모자는 후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라 한다.
부여읍의 가장 남쪽에 있는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이다. 신라 경주의 안압지보다 40년이 빠르다.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백제 왕실의 정원으로 조성한 연못이다.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20리 떨어진 곳에서 끌어와 인공섬을 만들고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한여름이면 홍연 백련 수련 등이 가득했을 궁남지는 지금 적막하기만 한 하얀 눈밭이다. 이따금 무리지어 날갯짓하는 철새들만 노닐고 있다.
지난해 여름 부여에선 세계대백제전이라는 커다란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때 문을 연 곳이 백제문화단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백제의 왕궁을 복원해놓았다. 사비궁 능사 고분공원 생활문화마을 위례성 등으로 구분돼 있다. 입구의 백제역사문화관은 백제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부여=글ㆍ사진 이성원기자
■ 부여 여행수첩
공주-서천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부여 가는 길이 빨라졌다. 부여IC에서 나와 부여읍까지 10여분이면 도착한다.
백제문화단지 앞에 고급 숙박공간이 들어섰다. 지난해 9월 오후에 개관한 롯데부여리조트다. 아쿠아월드 시설도 갖추고 있다. (041)939-1000
부여의 맛집은 부소산성 인근, 구드래 나루터 가는 길에 모여있다. 아예 구드래 음식거리로 조성돼 있어 이 길만 찾아들면 구드래돌쌈밥(041-836-9259) 등 기호에 맞는 부여 음식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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