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담과 인사라는 게 있다. 새해가 오면, 누구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를 하고,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란다고 덕담을 한다. 한 해 내내 좋은 일만 생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야 하겠으나, 크게 좋은 일이 사소하게 나쁜 일들을 덮어 한해 내내 마음이 넉넉하라는 뜻이겠다. 또는 반대의 뜻일 수도 있다. 사소하게 좋은 일들이 크게 한번 나쁜 일쯤 두둑이 덮어 삶이 또 그렇게 온유하라는 뜻일지도. 결국 생각하고 바라보는 방향의 문제겠다. 실패와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긍정하는 마음이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자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간직하고 싶은 청춘의 추억
지난해가 끝나갈 무렵에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춘천까지 전철이 들어가면서 무궁화호로 달리던 기차 경춘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사라진 것에 대해 말할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사라진 것의 추억에 대해서라면 그것이 또 남겨진 것이 아니겠는가.
춘천은 기차로 가야만 춘천이라고 말한다면, 단지 유명한 대중가요인 '춘천 가는 기차' 때문만은 아니다.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행, 지난 일이 생각나, 차라리 혼자도 좋겠네. 노래의 가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춘천은 다만 춘천이 아니라 '어딘고 하니 닿는 곳' 이었다. 그 사이에는 가평이 있고 대성리가 있다.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 한 밤 자러 놀러 가는 장소는 늘 가평이거나 대성리였다.
불안하고 막막했던 청춘의 시절, 통기타와 함께 지새우던 강가의 밤을 잊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술 취해 울고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는 남 몰래 꿈을 꾸었을 것이다. 학생 때가 아니더라도 문득 청량리까지 달려가 경춘선 표를 끊었던 기억이 있다. 가야 할 곳이 어딘들 어떠랴. 춘천까지 못 미쳐 아무데서나 내려도 좋고 그저 춘천까지 갔다가 하릴없이 돌아와도 좋았다. 그러니까 경춘선은 경부선도 아니고 중앙선도 아니고 그냥 경춘선이니, 생의 한 때를 거슬러가고 또 거슬러오던 기차였던 것이다.
추억이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경춘선이 사라진다는 소식 후에 '청량리-남춘천'으로 표시된 행선 표지판이 역내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 한 두건이 아니란다. 누군가 슬몃 떼어가 버렸을 것인데, 설마 언젠가 돈 될 일 생각하고 훔쳐간 것이겠는가. 그런 사람도 없지 않을지는 모르나 대개는 아마도 추억을 쟁여놓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기차도 사라지고 추억이 사라지는데 표지판 하나 떼어가는 게 무슨 큰일이랴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표지판들은 이제 어느 집의 거실이나 침실 벽에 걸려있을 것이다. 마음으로 떠나는 경춘선이 매일 같이 경적을 울리겠다.
얼마 전 일본의 한 소도시에서 객차 내에 난로가 있는 기차를 탈 일이 있었다. 그런 기차는 오래 전의 기록을 담은 책자에서나 보았던 것이라, 내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날 한국인 관광객들이 객차를 전부 채워 난로 위에는 오징어까지 올려졌다. 객차 안에 오징어 굽는 냄새가 가득 찼으니, 소주 한잔도 그리웠다.
그리움을 넉넉한 덕담으로
경춘선도 그렇게 남겨놓았으면 좋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남기는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게 남겨진 것만이 추억은 아닐 터이다. 사라진 것이 마음속에 쟁여져 그리움이 되고, 그리운 것이 많아지니 더 살고 싶어지고, 더 살자니 기왕에 잘 살기를 바라게 되고, 잘 살자면 기왕 한껏 남들과 함께 다 같이 잘 살고 싶어지고, 그러는 마음이 또 넉넉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기도 하겠다.
새해 벽두다. 뾰족한 것 좋아하는 사람도 한껏 둥글어져 누구에게든 덕담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때다. 새해의 마음이 세밑까지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사람에게 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게도 덕담 한번 날려야겠다. 올해에는 부디 좋은 일만 있으소서.
김인숙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