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젊은 시절의 나는 유난히 특종에 대한 욕심이 강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카메라를 들고 취재 현장을 갈 때마다 주위를 살피며 특종이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1960년 1월 26일, 이 날은 음력 섣달 그믐날로, 민족의 명절 설을 맞아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객들로 서울역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시골로 향하는 귀성객들을 스케치한 후 신문에 쓸 사진들을 마감하고 나니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회사로 돌아왔는데 왠지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판매하는 기차표는 700여 장이 남았는데 이를 구입하려고 줄을 선 승객들은 대충 잡아도 1,500명은 훨씬 넘어 보였다. 표를 구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치는 승객들을 헤집고 두 번째 개찰구 쪽으로 향하는 순간, 갑자기 '우당탕'하며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개찰구 너머에 서너 사람이 쓰러지며 인파가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좁은 개찰구에 워낙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뒷사람이 앞사람을 밀어 계단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압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날 사고는 서울발 목포행 밤 10시 40분 호남선 601열차가 서있는 제3홈 계단과 통로에서 발생했다. 개찰구를 넘어 플랫폼으로 향하니 이미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본능적으로 특종이라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진기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흥분된 마음으로 플래시 불빛을 터뜨리면서도 '동료 기자들이 오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 사진을 찍었는데 기자는 나 혼자 밖에 없으니 현장만 깨끗이 치우면 그만이다. 사고 수습을 위해 현장에 나온 철도국 직원들에게 사상자들을 빨리 옮기라고 고함을 쳤다. "빨리 병원으로 옮기세요. 여기는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으로!" "여기도 빨리! 용산 철도병원으로 가세요!" "서대문 적십자병원, 그리고 서울대병원!!" 마치 사고수습본부에서 나온 요원처럼 소리를 지르며 가끔씩 잽싸게 셔터를 눌러댔다.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코트 안에 카메라를 넣고 개찰구를 다시 빠져 나오는데 김일환 교통부장관과 경쟁지였던 한국일보 장기영사장이 들어서며 "사건이 얼마나 커?"하고 물었다. 나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제가 오니까 다 치워졌던데요"라고 대답한 후 황급히 조선일보사로 돌아왔다. 현상을 해보니 처참한 현장 상황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다음날 서울역 압사사건은 신문에 크게 실렸고 특종을 했다는 주위의 칭찬에 우쭐해 사상자들에 대한 명복조차 빌지 못했다.
조선일보에서의 생활이 5년쯤 지날 무렵, 5ㆍ16이 일어났고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자매결연을 맺는 행사가 붐을 이뤘다. 시골학교 어린이들이 서울 구경을 하러 상경하고 서울에서는 지방으로 공책 연필 등을 선물로 보내곤 했다. 1961년 11월 경, 경기도 수원의 시골 학교에서 서울 나들이를 하는 학생들을 찍기 위해 시흥에서 기차에 동승하여 서울역까지 왔다. 나름 즐거운 표정을 골라 2장을 넘겼는데 편집국장 윤주영씨가 부르더니 "이 사진 말고 다른 사진 없어요?"한다.
"다른 사진도 몇 장 있지만 이것이 가장 낫습니다." "필름을 좀 봅시다." 말투에 기분이 좀 상한 나는 "필름을 보는 것은 사진부장의 권한인데 국장께서는 신문 대장을 보셔야죠. 어떻게 필름을 보자고 하십니까?" 맞받았다. 윤국장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돌아섰고 사건은 유야무야 되는 듯했다.
의견 충돌이 있은 지 며칠 후, 조석간 시대이던 당시에 조간에 게재할 예정이던 재향군인회 통합회의 취재를 나섰다. 마감에 여유가 있어 동아일보 박용윤기자와 다방에서 차를 한 잔하며 얘기를 나누다 오후에 회사로 들어오니 사진부장이 당황한 얼굴로 묻는다. "어디 갔었어? 국장이 노발대발이야. 갑자기 석간 지방판에 사진을 쓰게 됐는데 연락이 안되어 코리아헤럴드에 부탁해서 간신히 한 장 넣었다구." "그건 조간에 쓰기로 하지 않았나요? 어쨌든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다음날 사진부 조규 선배가 편집국장이 시말서를 쓰라는 지시를 전해 왔다.
국장을 찾아가 "문서로 남는 것은 못하겠습니다. 4ㆍ19때 천일백화점 앞 특종이나 서울역 압사사건 때도 상금만 받았을 뿐입니다. 두 건에 대해 지금이라도 상장을 준다면 시말서를 쓰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저도 문서 형태로는 쓸 수 없습니다." 괜히 오기가 났다. 다음날 두 번째, 세 번째 시말서 요구가 나오자 나는 시말서 대신 사직서를 써서 국장에게 갖다 주었다. "이거 시말서입니다." 윤국장은 힐끗 쳐다보더니 "내일 점심이나 합시다."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시말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표를 내고 나니 이미 조선일보 기자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져 울적해진 기분에 평소 좋아하던 동아일보 이명동 선배를 찾아갔다. 이 선배는 내 말을 듣자 "이런, 성질머리하고는…. 내가 좀 알아볼게."하더니 이리저리 전화를 하다가 한국일보 최병학 사진부장과 다음날 시내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다음날 이명동 선배와 함께 나타난 최부장은 대뜸 나를 데리고 한국일보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님. 제가 어제 말씀 드린 조선일보 정범태 기자입니다." 자리에 앉아있던 한국일보 장기영사장이 우람한 몸집을 일으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 정기자는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지. 특종기자 아니야. 한국일보는 당신 같은 기자가 필요해. 용감하고 연구하는 기자 말이야. 위층에 올라가서 성인기 부사장과 홍승면 편집국장에게 인사나 하시오." 편집국에 내려서니 칠판에 벌써 사령이 붙어 있다. '명 사진부차장 정범태, 사진부기자 장홍근' 가슴이 두근두근해지고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젊은 신문 한국일보에서 새로운 기자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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