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신춘문예/희곡] '확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신춘문예/희곡] '확률'

입력
2010.12.31 17:31
0 0

▦등장인물

남자: 30대 후반

여자: 30대 중반

▦배경

4월의 어느 날, 국도변의 경사진 공원.

▦무대

무대 중앙에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벤치가 하나 놓여 있다. 벤치 주위로 조경수, 조형물, 쓰레기통, '자연보호'나 '산불조심'과 같은 푯말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막이 오르면 어둠. 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량이 강하게 들이받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서서히 새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무대가 밝아지면 벤치 위에서 한 쌍의 남녀가 놀란 얼굴로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 남자는 와이셔츠와 양복바지를 입고 있는데, 와이셔츠 단추가 풀어져 있어 가슴이 거의 드러나 보인다. 여자는 장미 모양 레이스가 도드라진 블라우스와 정장 치마를 입고 있다. 새 울음소리가 잦아들면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정면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남자 괜찮아?

여자 깜짝 놀랐어요. 당신은요?

남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여자 저 사람들, 많이 다쳤을까요?

남자 아마도. 덤프트럭은 멀쩡한데 저 승용차는 형편없이 찌그러졌잖아.

여자 누군가 구급차는 불렀겠죠?

남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겠지.

여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봐요. 사람들이 승용차 탑승자들을 구조하려나 봐요.

남자 전기톱으로 잘라내면 모를까, 차문이 쉽게 열리지 않을 텐데.

여자 (의자에서 일어나며) 우리도 가서 도와줄까요?

남자 힘쓰기 싫어. 어차피 곧 구급대원들이 올 거야.

여자 야박해요.

남자 뭘, 솔직히 우리가 가본들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여자 (금세 수긍하고 앉으며) 하긴 뭐…….

사이. 차량들의 경적 소리가 커졌다가 잦아든다.

여자 어쩌다 사고를 냈을까요?

남자 졸음운전이겠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저 봄 햇살 좀 봐. 식곤증 불러일으키기 딱 좋잖아.

여자 설마요.

남자 운전하면서 졸아본 적 없지?

여자 미쳤어요?

남자 그게 기분이 묘하다니까. 깜박 졸다 눈을 뜨면 차가 그대로 가고 있는 거야. (실제 운전하는 동작을 취하며) 미끄럼을 타듯이 주루룩…… 그러다가 차가 옆차선으로 넘어갈라 치면 재빨리 핸들을 트는 거지.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지만 묘하게 짜릿하기도 하거든.

여자 왜 그런 짓을 해요?

남자 일부로 그러는 게 아니라구. 인간의 3대 욕구 몰라?

여자 (고개를 저으며) 몰라요.

남자 성욕, 식욕, 그리고…….

여자 수면욕! 그거하고 졸음운전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신도 평소에 운전이 부주의하잖아요. 대체 왜 그리 안전에 소홀한 지 모르겠다구요.

남자 꼬투리잡기는! 난 그래도 이십 년 가까이 무사고 운전자야.

여자 (관심 없다는 듯 전방을 유심히 보다가) 어떤 사이였을까요?

남자 뭐가?

여자 저 승용차 운전석과 조수석에 탄 사람들 말이에요. 보니까 남녀 같은데.

남자 (하품을 하며) 별 게 다 궁금하군.

여자 친구 사이? 아님 부부 사이, 그냥 직장동료? 어쩌면 연인 사이?

남자 마지막 게 그나마 로맨틱하군.

여자 두 사람은 다투는 중이었을까요? 예전에 제 친구도 남편과 드라이브 중에 말다툼을 하다 사고를 냈다고 했거든요.

남자 쓸데없이 꼬투리 잡아 운전하는 남자 신경을 건드렸겠지.

여자 (흘겨보며)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남편이 바람을 폈다구요.

남자 바람?

여자 증거까지 댔는데도 계속 오리발이었다지 뭐예요. 그래서 머리 끝까지 화가 치 민 제 친구가 핸들을 잡아 틀어버리는 바람에…….

남자 저 사람들도 그랬다는 거야?

여자 (몸서리를 치며) 운이 없어 중앙선을 넘어버렸던 거죠.

남자 형편없는 추리군. 지금 몇 시지?

여자 두 시 십오 분요.

남자 이 시각쯤 연인이나 부부가 모는 승용차가 러브호텔이 즐비한 저 국도를 달리다 사고가 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여자 아니면요?

남자 불륜.

여자 설마요.

남자 맞을 걸?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여자 뭔데요?

남자 저기 찌그러진 차문을 뜯어내면 말야. 남자는 운전석에서 바지를 내린 상태일지도 몰라.

여자 왜요?

남자 여자 입을 벌려보면 알지.

여자 입은 왜요?

남자 운전 중에 여자가 오랄 섹스를 해주면 남자는 미치기 직전이야. (실제로 오랄 섹스를 받는 자세를 취하며) 사고가 날지도 모르고,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스릴에 쾌감이 몇 배는 커지거든.

여자 (눈을 흘기며) 저질…….

남자 그러다 주의가 흐트러져 꽝! 사고가 나면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성기를 꽉 물어 뜯는 탑?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남자는 영락없이 성기를 잃고 말지.

여자 말도 안 돼요.

남자 지어낸 얘기 아냐. 내 친구 중에 경찰이 있는데 자유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해 달려가 보면 종종 그런 장면을 종종 목격할 수 있댔거든.

여자 (몸서리치며) 그런 이야긴 듣고 싶지 않아요. 이 시각이라고 해서 저 승용차에 탄 사람들이 부부나 연인이 아닐 확률도 높진 않을 거 같은데요?

남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여자 불륜이었다 해도 저는 차라리 졸음운전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고 말겠어요.

남자 그러든지.

사이. 멀리 차량에서 곡명을 알 수 없는 트로트 메들리가 들려오다가 잦아든다.

여자 저 사람들, 어디서 오는 길이었을까요?

남자 뻔하지 뭐. 러브호텔에서 지칠 때까지 뒹굴다 나와 인근 식당에서 장어구이 정도를 먹고 오는 중이었겠지.

여자 장어구이요?

남자 (입맛을 다시며) 군침 돌지? 매콤하게 양념한 걸 숯불에 구워 먹으며 맥주를 곁들이면 끝내주는 스테미너 보양식이잖아.

여자 난 징그럽기만 하던데.

남자 저기 봐. 형편없이 찌그러졌지만 외제차야. 저 정도 몰 정도면 경제력 있는 삼십대 중후반 이상일 가능성이 높아. 이십대가 아닌 이상 섹스로 힘을 빼면 으레 몸보신이 간절해진다구.

여자 전 그런 거 잘 몰라요.

남자 내숭떨긴!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뭔지 알아?

여자 (짐작은 하지만) 몰라요.

남자 섹스. 기뻐도 슬퍼도 두려워도 심심해도 섹스는 위안이 돼.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에 걸린 남녀들이 밀폐된 공간에 갇히게 됐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미친 듯이 몰두했던 게 뭔지 알아?

여자 (주저하다) 섹스요?

남자 빙고! 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하면 마찬가질 걸?

여자 전 그런 거 싫어요. 차라리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며 죽음을 맞겠어요.

남자 (비웃으며) 과연 그럴까?

여자 그럴 거예요.

남자 내가 아는 당신은 결코 혼자서 조용히 죽음을 맞는 스타일이 아냐. 아마도 한 남자한테 만족 못하고 두서너 명과 난리를 치고 말걸?

여자 (입술을 깨물며) 멋대로 말하지 말아요.

남자 삐졌군. (일어나며) 그만 갈까?

여자 아뇨, 여기 조금만 더 있다 가요.

남자 왜?

여자 사고 현장이 마무리 될 때까지 지켜보고 싶어요.

남자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여자 그럼 저 차 안에 갇혀 있는 남녀도 조금쯤 덜 외롭지 않을까요?

남자 (마지못해 앉으며) 감상적이군.

여자 그게 제 매력이라면서요. 순진한 소녀처럼 구는 게 좋다고 말해줬잖아요.

남자 내가 그랬나?

여자 (눈을 흘기며) 그랬잖아요.

남자 그렇다고 해두지.

여자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네요.

사이.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잦아든다.

여자 저 두 사람, 어떻게 만났을까요?

남자 모르지.

여자 운전에 서툰 여자가 우연히 남자 차에 접촉사고를 냈을까요?

남자 어쩌면.

여자 남자가 여자의 골프 레슨 선생님이었을까요?

남자 어쩌면.

여자 동창회 같은 데서 헤어졌던 옛 애인을 다시 만났던 것일까요?

남자 어쩌면. 아니, 그게 제일 그럴듯하군.

여자 그래요?

남자 그랬다면 남편이나 처한테 질릴 대로 질렸던 때 차에 만났으니 얼마나 금세 몸들이 뜨거워졌겠어.

여자 듣기 거북하네요. 집에 있는 남편이나 처만 불쌍하잖아요.

남자 어쩌겠어, 본능인걸.

여자 본능요?

남자 익숙한 것엔 쉽게 질려버리는 본능.

여자 참 슬퍼요.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남자 원래 인간이란 곁에 있는 존재의 소중함은 쉽게 망각해버리는 속성이 있거든.

여자 그러다 잃어버리면요?

남자 그리워하지.

여자 다시 곁에 있으면 또 질려버리구요?

남자 빙고!

여자 그렇다면 저 남녀도 오래 만났다면 서로 질려했겠군요.

남자 그렇겠지.

여자 그렇다면 두 사람은 그 옛날에 헤어질 필요가 없었던 거잖아요. 어차피 누굴 만났든 결국 질려버렸을 텐데 참고 지냈어야지.

남자 문제는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는 거야.

여자 무슨 말이에요?

남자 새로움을 갈구하는 욕망. 그게 결국 사람을 추악하게 만들지. 새 옷, 새 차, 새 집, 새 애인, 아마 끝도 없을 걸? 죽어서도 마찬가지야. 노인들이 비싼 수의를 준비하고 묘자리를 봐두는 것도 사후의 새로운 삶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야.

여자 그게 꼭 나쁘다고 할 순 없을 것 같은데요. 같은 새 옷, 새 차, 새 집, 새 연인이라도 누가 주인공이냐에 따라 다른 가치를 지닐 수도 있으니까.

남자 문학女?같은 소리 하고 있군.

여자 비꼬지 말아요.

남자 어쨌든 남녀 사이는 오래 갈수록 지지부진해져.

여자 당신은 너무 비관적이에요.

남자 (전방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저 남자가 어떤 사람이었을 것 같아?

여자 누구요? 저 찌그러진 승용차에 탑승한 남자요?

남자 내가 보기엔 둘 중의 하나야.

여자 뭐가요?

남자 오늘이 월요일이지?

여자 그렇죠.

남자 잘 생각해 봐. 월요일 오후 두 시 십오 분경에 이런 교외에서 교통사고를 냈다면 남자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자유로운 전문직 종사자거나 백수일 게 분명해.

여자 평범한 직장인이 월차를 냈을 수도 있잖아요.

남자 바보. 그런 직장인이 미쳤다고 옛사랑과 이런 곳까지 나오겠어? 집 근처에 널린 게 모텔이고 여관일 텐데? 평범한 직장인의 삶은 그리 여유롭지 않아.

여자 과연 그럴까요?

남자 확률적으로 따져보자는 거야. 내 생각에 남자는 후자야.

여자 백수라구요?

남자 제정신 박혀 있는 전문직 종사자라면 젊은 애인도 아니고 기껏 옛사랑 때문에 돈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시간을 이런 곳에서 허비하진 않았을 테니까.

여자 순전히 엉터리군요.

남자 뭐?

여자 당신이 말하는 그 확률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잖아요.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지.

남자 답답하군. 크고 작은 선거 때마다 설문조사를 해서 당선자를 예측하는 거 알지? 그게 대부분 맞는 건 왜 그렇다고 생각해?

여자 글쎄요.

남자 표본조사라는 게 있어. 어떤 집단의 공통적인 의사구조를 파악할 때 쓰는 기법이지. 투표권을 가진 사람을 전부 조사할 수 없으니까 일부만 채택해 통계를 내는 거야. 따지고 보면 결국 그게 확률이야.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확률.

여자 그게 저 남자가 백수일 거라는 당신의 짐작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남자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다른 대대수의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 테니까 제법 높은 확률을 지니게 된다는 거지.

여자 (고개를 흔들고) 억지예요.

남자 확률이야.

여자 좋아요. 당신 말이 맞다 쳐요. 저 남자가 백수라고 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남자 있지. 그렇다면 두 사람의 재회에는 순수하지 않은 목적이 개입했을 테니까.

여자 목적요?

남자 남자가 삼십대 후반의 백수라면 옛 애인한테 바라는 게 과연 섹스뿐일까?

여자 돈이라도 노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남자 그럴 확률이 높지.

여자 (입술을 내밀며) 말도 안 돼요. 더 이상 당신 말은 듣기 싫군요.

남자 그러든지.

사이. 교통을 통제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커졌다가 잦아든다.

여자 두 사람은, 과거에 왜 헤어졌을까요?

남자 (하품을 하고) 뻔한 걸 묻고 있군.

여자 뭐가요?

남자 저 차를 봐. 저 정도 고급차를 몰 정도면 남편이 꽤 부유해야 하지 않겠어? 아마도 저 여자는 처녀시절에 배우자감으로 무엇보다 경제력을 따졌을 거야.

여자 여자가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졌을 수도 있잖아요.

남자 그런 여자가 월요일부터 내연남과 밀회를 즐기러 왔다가 저기서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은 높지 않겠지.

여자 (고개를 흔들고) 또 그 확률이군요.

남자 여자는 오래 전에 남자의 미래가 별 볼일 없다는 걸 파악하자마자 결별을 선언했을 거야. 그리고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났겠지.

여자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뭐 그리 잘못인가요? 남자들이 예쁜 여자만 찾는 거나 다름 없잖아요?

남자 (쓴웃음을 흘리며) 그거야 그렇지만.

여자 근데 좀 안타깝네요. 만약 저 남자가 진심으로 여자를 사랑했다면, 여자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어야 정상 아닌가요?

남자 노력은 했겠지.

여자 성과가 없었군요?

남자 남자의 출생년도를 1972년도쯤으로 쳐보자구. 스무 살에 대학에 들어가 군대 다녀와서 대학을 졸업했을 해가 대충 1997년도쯤 됐을 거야. 우리가 알고 있는 IMF 세대란 말이지. 요새 젊은 애들이 88만원 세대 어쩌고 엄살을 떨며 취업난 운운하는데 IMF 세대만 하겠어?

여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건 그래요.

남자 남자는 아마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취업재수생 신세로 비루하게 이십대 후반을 보냈겠지. 그 와중에 여자가 떠났던 것일 테고.

여자 그렇다면 저 남자도 할 말은 없네요. 그러게 미리미리 자기 계발에 신경 써서 스펙을 높여놨으면 능력 없어 사랑을 잃진 않았을 거잖아요.

남자 하나마나한 이야길 하는군. 애초에 그럴 인간이 못 되었으니까 문제인 거지.

여자 (한숨을 내쉬며) 딱하네요.

남자 아마 남자는 실연을 당한 뒤 몇 주 정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잤을 거야. 거의 폐인에 가까워졌겠지. 하지만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릿 속에 단어가 하나 떠올랐을 거야.

여자 무슨 단어요?

남자 (양팔을 허공으로 뻗으며) 자유!

여자 말도 안 돼요.

남자 (양팔을 내리고) 남자는 그 동안 자신이 사랑했다고 믿었던 여자가 사실은 자신의 족쇄였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거야.

여자 자기 변명, 아니 자기 위안 같은 거 아니었을까요?

남자 글쎄, 전혀 아니라곤 할 수 없겠지만 남자는 그제야 무거운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겠지. 이 나라에서 여자와 결혼하려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잖아.

여자 하지만 저 남자도 다른 여자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면서요.

남자 몇몇이 있었겠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났을 거야. 남자는 여자의 육체만 탐했을 뿐 마음은 주지 않았을 테니까.

여자 왜요? (기대 어리게 양손을 모으고) 혹시 옛사랑을 못 잊어서?

남자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군. 저 남자는 자신이 결혼 따위하곤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여전히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을 테고.

여자 어쨌든 일은 했을 거 아녀요?

남자 작은 회사를 전전했겠지. 그런 덴 워낙 박봉이고 성질 나쁜 사장이 시키는 일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인내심 갖고는 오래 못 버티거든. 이런저런 회사를 드나드는 사이에 결국 나이만 먹어가다 나중에는 다닐 만한 회사를 찾을 수도 없는 신세가 됐겠지.

여자 그러다 옛 애인을 만난 거겠군요?

남자 빙고!

여자 어쨌든 비극적인 결말이네요. 한 때는 사랑했던 사이였는데 세월이 지나 기껏 불륜 관계에 빠졌다가 저리 처참하게 죽었다니.

남자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잘 된 일일 수도 있지.

여자 냉정하군요.

남자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이야.

여자 남자는 비참한 백수 신세여서 차라리 잘 됐다고 쳐도 여자는 달랐을 수 있잖아요. 돈 잘 버는 남편 마나 윤택한 삶을 즐기고 있었을 텐데.

남자 내내 지겹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남편에겐 애정이 없었을 테니까.

여자 결혼생활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요? 인내하며 사는 거지.

남자 글쎄, 저 여자는 그게 힘들었나 보지.

여자 (이맛살을 찌푸리며) 당신은 저 여자를 나쁘게 몰아가고 싶은 모양이군요?

남자 남자에 대해서도 좋게 말한 적 없어.

여자 근데 우리가 하는 이런 이야기, 좀 우스운 거 같아요.

남자 뭐가?

여자 그렇잖아요.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맘대로 설정해서 비난하고, 동정하고…….

남자 그러니까 그만 가자고 했잖아.

여자 아뇨. 조금만 더 있어요.

남자 (고개를 흔들며) 고집불통이군.

여자 어쨌든 당신 말대로라면 저 여자는 옛 애인을 만나기 전까지 무료한 결혼생활을 지속해왔겠네요.

남자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은 했겠지.

여자 돌파구요?

남자 수영 강습을 하거나 영어회화 학원을 다닌다든지 하는 거.

여자 그 정도면 꽤 건전한 거 아닌가요?

남자 글쎄, 젊은 남자 강사의 수영 팬티가 작을수록 수강 신청하는 아줌마들 수가 증가한다는 걸 알면 그렇지도 않지.

여자 그렇대요?

남자 그래서 과거엔 일부다처제가 가능했는지도 몰라. 남자 성기 하나를 두고 우르르 몰려들어 경쟁하는 꼴이라니.

여자 그건 너무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이네요. 물론 젊은 수영강사가 눈요기 거리는 되겠지만 순수하게 운동을 목적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남자 영어학원도 마찬가지야. 코 큰 외국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줌마들로 넘쳐나지.

여자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뭐예요?

남자 저 여자는 최소한 그런 아줌마들과는 달랐을 거라는 거지.

여자 그래요?

남자 그런 사람들이 있어. 겉으로는 온화한 날씨처럼 기복 없고 잠잠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해일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날 만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캐릭터. 그런 부류는 환경적인 요건만 갖춰지면 치명적인 일탈을 꿈꾸지. 그게 결국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여자 저 여자가 그랬다는 건가요?

남자 빙고!

사이. 차량들의 경적 소리가 커졌다가 잦아든다.

여자 저기 봐요.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어요.

남자 (일어서며) 그럼 우린 이제 갈까?

여자 아직요. 저 남녀를 차 안에서 꺼내지 못했잖아요.

남자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차문을 뜯어내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여자 그래도 이왕 지체한 거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불쌍하잖아요.

남자 동정이 지나치군.

여자 우리도 급할 거 없잖아요. 안 그래요?

남자 (마지못해 앉으며) 그렇긴 하군.

여자 어쨌든 저 남녀는 다시 만나는 게 아니었군요?

남자 결과론적으로는 그렇지.

여자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구요?

남자 각자 목적에 충실했을 테니까 나쁠 건 없었겠지.

여자 무슨 말이에요?

남자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줄 게 있었을 테니까.

여자 쉽게 좀 이야기해 봐요.

남자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여자는 남자에게 돈을!

여자 정말 그랬을까요?

남자 여태까지 우리가 해온 이야기를 토대로 보자면 그래.

여자 그게 꼭 나쁘다고 볼 순 없잖아요. 남자는 돈이 필요하고 여자는 사랑이 필요해서 서로 조금씩 나눠가졌다면.

남자 오래갈 수 없었다는 게 문제지.

여자 왜요?

남자 아까 말했잖아. 지지부진해지기 마련이라고. 게다가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졌을 거야.

여자 그건 또 왜요?

남자 한국은행도 아닌데 여자라고 계속 돈이 넘쳐났겠어? 그러니까 남자로서도 여자를 만날 이유가 없어졌겠지.

여자 저 남자도 예전처럼 여자를 좋아하게 됐을 수 있잖아요.

남자 설사 그렇다고 해도 무게 중심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어. 가벼운 쪽, 그러니까. 평정심을 잃는 쪽이 약자가 되는 거야.

여자 여자가 약자였겠군요?

남자 백퍼센트! 저 남자는 그 방면에는 도가 텄을 걸? 만나는 여자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유리한 고지에서 상대를 농락해왔을 거야.

여자 (주먹을 쥐며) 고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쁜 놈이었네요.

남자 그럴수록 여자들은 미련을 못 버렸을 테니까.

여자 저 여자도요?

남자 욕망은 멈추지 않는 법이거든.

여자 계속 돈을 줬을까요?

남자 결국엔 남편이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겠지.

여자 (한숨을 내쉬며) 그럼 더 이상 방법이 없었겠네요.

남자 그랬을 때 모처럼 남자가 데이트 제안을 해왔고, 오늘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오게 됐겠지.

여자 그럼 오늘 저 여자는 기분이 좋았겠는데요?

남자 오래가진 못했겠지.

여자 왜요?

남자 저 남자가 정말로 여자하고 데이트를 하고 싶어서 불러냈겠어?

여자 아니면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헤어지자고 말했군요?

남자 빙고!

여자 잔인해요.

남자 모텔에서 섹스를 마친 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겠지. 아쉽지만 이제 각자의 갈 길을 가자고.

여자 여자가 순순히 응했을까요?

남자 버리지 말아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겠지.

여자 (고개를 흔들며) 신파군요.

남자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처참하게 버림 받아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심정 이해할 걸? 그 순간에는 자존심을 생각할 수가 없지.

여자 슬프네요.

남자 그래도 여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모텔 주차장에서 승용차가 출발하던 순간에도 울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달라고 남자에게 사정하고 있었겠지.

여자 남자도 사람인데 맘이 약해지지 않았을까요?

남자 그래서 눈물도 닦고 허기진 배도 채우고자 장어구이집에 들렀을 테고.

여자 먹고 나서는요?

남자 남자가 말했겠지. 짧지만 아름다웠던 사랑을 영원한 추억으로 삼자고. 헤어지더라도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주자고.

여자 그럴 듯한 말이네요.

남자 여자의 허영을 채워주기에 적절했지.

여자 허영이라뇨?

남자 우연한 만남, 메마른 일상에 뿌려지는 단비와 같은 사랑, 그리고 가슴 저린 이별까지, 완벽한 남자의 각본이었을 테니까.

여자 그렇다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는 거예요?

남자 당연한 거 아냐? 헤어진 남녀가 십여 년이 지나 다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설사 만났다 쳐도 그 두 사람이 다시 살을 부비며 연애할 수 있는 확률은? 계획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여자 그럼 결국 저 남자는…… 여자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남자 사랑? 아직도 그딴 걸 믿어?

여자 전 믿어요.

남자 차라리 욕정을 믿는 게 낫겠군. 저 남자도 아쉽긴 했을 거야. 돈도 돈이지만 헌신적으로 서비스하는 여자와의 공짜 섹스도 나쁘지 않았을 테니까.

여자 (못 믿겠다는 얼굴로) 설마요.

남자 설마가 사람 잡지. 저리 사고가 난 원인도 그 때문이었을 거야.

여자 (멍한 얼굴로) 무슨 말이에요?

남자 남자가 운전하는 중에도 여자는 계속해서 울며 매달렸을 거야. 어느 순간 남자는 그런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게 됐을 테고.

여자 (고통스럽게) 그건…… 왜요?

남자 남자들은 우는 여자를 앞에 두고 두 가지 생각으로 갈등해. 여자를 울렸다는 죄책감과 주체할 수 없이 치솟는 성욕. 우는 여자가 얼마나 색정적으로 보이는지 모르지? 그럴 때 관계를 하면 성감이 최고조에 이를 확률이 높다구.

여자 (심호흡을 하고)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남자 그래서 남자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다른 손을 뻗어 여자의 가슴을 움켜쥐었을 거야. 여자는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내질렀을 테고.

여자 (토할 듯이) 제발…… 그만 해요.

남자 남자는 서둘러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발기한 성기를 꺼내놨을 거야. 여자는 곧 충실한 하녀처럼 남자가 시키는 대로 오랄 섹스를 해줬겠지.

여자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그만…….

남자 남자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여자는 평소보다 더 열심이었겠지. 어쩌면 그걸 계기로 남자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테고.

여자 (날카롭게) 그만하라니까요!

남자 남자는 짜릿한 쾌감에 젖은 채 운전대를 잡고 있었을 거야. 맥주도 한 잔 했던 터라 정신이 몽롱해진 상태였을 테고. 그런 상태로 운전을 계속했던 게 실수였어. 여자의 뛰어난 혀놀림도 문제였지. 남자가 절정에 달해 자신도 모르게 악셀을 힘껏 밟는 바람에 승용차는 중앙선을 넘어 돌진했던 거야.

여자 (몸부림치며) 그만!

남자 남자가 덤프트럭을 발견하고 핸들을 돌리고자 했을 땐 이미 늦었겠지. 꽝! 한순간 차체는 저리 형편없이 찌그러져버린 거야. 그 순간 남자는 성기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어!

여자 (벌떡 일어나며) 그만! 그만 하란 말야 이 미친놈아!

사이. 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남자와 여자, 유심히 전방을 바라보고 있다. 새 울음소리가 잦아들면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정면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남자 이제야 차문을 전기톱으로 잘라냈군.

여자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두 사람이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남자 그랬으면 좋겠군.

여자 저 사람들, 죽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남자 그럴 겨를이나 있었을까?

여자 있었다고 치면요.

남자 글쎄.

여자 여자는 그나마 사랑하는 사람과 죽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거 같아요.

남자 끝까지 감상적이군.

여자 남자는 어땠을까요?

남자 이런 식으로 죽을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

여자 말도 안 돼요.

남자 두 사람이 구급차에 옮겨 실어졌군. (일어서며) 우리도 그만 가지.

여자 (한숨을 내쉰 뒤 일어서며) 그래요, 가요.

남녀, 손을 잡고 퇴장하면 구급차 소리 멀어지며 서서히 암전.

김성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