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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시각장애 딛고 '좌우파사전'으로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이건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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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시각장애 딛고 '좌우파사전'으로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이건범씨

입력
2010.12.3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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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글자를 읽을 수도 없는 그가 출판에 뛰어든 것 자체가 자신의 말대로라면 "코미디"였다. 모니터에 코가 닿을 만큼 바짝 얼굴을 밀착해도 문자의 흐릿한 윤곽과 빛의 깜빡임만 보일 뿐. 글을 소리로 변환시켜 주는 IT기술 덕을 보긴 했으나 글을 소리로, 소리를 다시 글로 바꾸는, 먼 산 돌아가는 그의 책 편집 과정은 차라리 부조리극에 가까웠다.

이런 그가 2년 동안 자신의 글만이 아니라 남의 글까지 편집하며 매달렸던 책이 올해 한국일보가 주최한 제51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교양)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좌우파사전> (위즈덤하우스 발행)의 기획ㆍ편집자이자 공동 저자인 이건범(46)씨 이야기다. 지난 17일자 본보를 통해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친구와 선후배들은 페이스북 등에 "왜캐 가슴이 찡한 게 기분이 좋냐!" "그의 노고에 경배를!" "연말 힘이 솟는 소식이다"는 등의 축하 메시지를 쏟아냈다.

이씨와 수상 인터뷰를 할 때만 해도 기자는 그가 시각 장애인이란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떻게 신문사로 찾아왔고 어떻게 걸어 나갔는지 눈썰미 있게 챙기지 못했던 탓이다. 이씨는 흑ㆍ백ㆍ회색의 희뿌연 시야 속에서 사물의 형체만 어렴풋이 보이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기자가 놓쳤던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민주화운동으로 1990년대초 2년여 수감됐던 그가 출감 후 연매출 100억원대의 기업을 일군 CEO였다가, 그만 쫄딱 망해 알거지 신세가 된 인물이라는 정보도 뒤늦게 얻었다.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그에게 2010년은 생의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선 한 해였다. 그는 한 해 최고의 책을 쓰고 만든 출판상만이 아니라, 감동의 휴먼드라마 부문 상까지 받아야 했을지 모른다.

이씨를 다시 만나기 위해 지난 27일 서울 서교동 출판사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후배가 운영하는 출판사 상상너머에 합류해 새 책 만드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수감 중 겪었던 일을 쓴 책을 내년 3월께 출간할 예정이라는 그는 "옛날 일 팔아먹는 것 같긴 하지만…"이라며 멋쩍어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83학번으로 대학시절 혁명을 꿈꿨다는 그는 감옥에서 생의 좌표를 잃었다가 로맹 롤랑의 소설 <매혹된 영혼> 등을 읽으며 인간 내면세계의 다양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혁명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버렸다. 출감 후 1994년 교육용 콘텐츠 회사를 차려 사업에 뛰어든 그는 120여명의 직원을 두는 등 승승장구, '386 출신 CEO'로도 제법 이름도 알렸다. 하지만 2001년 벤처 열풍에 무리한 투자를 한 게 화근이었다. 2006년초 수십억원의 부채를 안고 회사는 문을 닫았다. "장렬히 전사했다"고 그는 표현했다. 눈 상태는 그 사이 악화돼 시각장애 5급에서 1급이 됐다. 1급 판정으로 받은 보험금 1억여원도 회사 빚 청산에 털어넣었다.

회한이 짙게 배어있을 이런 과거사를 얘기하는 이씨의 어조는 그러나 믿기 힘들 정도로 명랑했다. 그는 지난 생을 캐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제 장애까지 팔아 먹게 생겼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의 이런 '밝음'과 '내려놓음'이, 민주화운동_수감_창업_성공_파산_시각장애로 이어진 자신의 생의 트라우마를 이겨낸 방법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 망한 얘기를 떠벌렸죠. 그러다 보니,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더라고. 얘기하며 내 마음을 물로 닦아내듯이 자꾸 닦아낸 거죠. 속상한 일 당한 사람들한테 그런 말 해줍니다. 30~40번쯤 떠벌리면 무덤덤해질 거라고."

눈 때문에 책과 멀어졌던 그가 출판에 뛰어들 생각을 한 것도 이 기막힌 낙관적 사고 덕분이었다. 후배의 제안으로 2008년 출판사에 들어간 그가 기획한 책이 <좌우파사전> 이었다. 14명의 저자가 공동 집필한 이 책은 좌우로 갈라진 한국사회를 치밀하고 일관된 균형감각으로, 외눈박이의 시야에서 벗어나도록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14명의 원고를 조율하는 게 '앞 못 보는' 그의 몫이었다. 글을 소리로 바꿔주는 TTS(text to Speech) 프로그램을 통해 원고를 수십 번씩 듣고 수정했다. 이씨는 "소리로 들으면 좋은 점도 있다"며 "어색한 문장 연결, 논리적 비약 등이 잘 느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세월에 속이 다 탔을 게 분명한 이씨의 부인은 그의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후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낙관적 사고와 불굴의 의지를 보면, 눈만 나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신이 공평하기 때문에 눈이 나쁜 건 아닌가, 그리고 자신의 장애를 통해 세상에 대해 더 폭넓은 시각을 가지게 되었으리라고 자위한다." 어두울수록 더 크게 눈을 뜨자고, 더 폭넓게 세상을 보자고, 이씨는 우리에게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글·사진=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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