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 당선소감
나는 작년 이맘 때 대학 노트에 이렇게 쓴 적 있다. '숲은 만져 본 적 없는 울음의 낯선 천국이다. 숲은 헐벗은 동공이다. 그리고 메마른 바람이 지나치는 언젠가 살아본 그만그만한 표정이다.' 나는 자주 숲길에 들어섰고 숲에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걷곤 했다. 숲은 늘 낯설고 평온했다.
종종 숲에서 길을 잃었고 숲길을 한참 걷다보면 어느새 어둠이었다. 숲 어딘가에 퍼질러 한나절 먹먹하게 울고 싶다가도 간혹 숨이 턱턱 막혀왔기에 느리고 길게 호흡해야만 했다. 내가 한 때 메마른 심장으로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음을 고백한다.
노트에 나를 적는 밤이 짧아지기를 바란다. 나 아닌 다른 여행자의 숲길에서 나 아닌 무수한 여행자들에게 말 걸 수 있는 밤이 오래 찾아 들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여태 사랑해 왔던 모든 사랑을 되찾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마주할 모든 사랑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서로의 여행과 마주하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숲길을 따라 걷는 중이다. 내가 무심결에 지나쳤을 숲길 사이로 한 무더기의 빛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내 사랑에 대답해야 할 의무를 갖고 싶다. 나는 빛의 표정으로 또 다시 살고 싶어진다.
한남대 국어국문학과 신익호 지도교수님과 여러 교수님들께, 문예창작학과 김완하 교수님을 비롯한 교수님들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멀찌감치 어떤 절실한 힘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애인에게 감사드린다.
■ 인터뷰
박송이(30)씨가 본격적으로 시를 쓴 것은 2003년 무렵부터다. 국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오랜 꿈을 좇아 한남대 국문학과에 진학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남들과 별다를 바 없는 인생이 되겠구나' 하는 위기감에 1년 동안 휴학을 했다 복학한 해였다. 박씨는 문예창작과에 복수 전공을 신청했고 시인 김완하 이재무, 소설가 김탁환씨 등의 수업을 들으며 창작의 묘미를 깨달아갔다. "주간에는 국문학과, 야간에는 문예창작과 수업을 들었는데 피곤하기는커녕 무척 즐거웠어요. 내가 시를 알아가고 있구나, 갈 길이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자신감은 교내 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되면서 부쩍 커졌다.
그러나 등단은 쉽지 않았다. 2005년부터 꾸준히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번번이 낙선했다. 국문학과 대학원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아 2008년 수료했지만 모교의 시간강사 외에는 강의 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나이 서른에 번듯한 직장도 없고 그렇다고 강의 자리가 많은 유능한 강사도 아니고, 방랑자 같은 마음으로 갈팡질팡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시인이 되려는 소망 하나 붙들고 살아가던 그에게 올해 신춘문예 시즌을 앞두고 시가 불현듯 '찾아왔다'.
지난 가을학기 모교에서 강의하며 잠자리를 신세 졌던 후배의 아파트에서 박씨는 베란다 창에 찍힌 새 발자국을 발견했다. '어느 순간에 발자국을 남기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 새. 과연 비행한 것일까 추락한 것일까.' 스스로도 낭떠러지에서 비행과 추락의 기로를 걷고 있다는 박씨의 자의식은 새 발자국이 준 단상을 시상으로 확장시켰고, 그렇게 탄생한 시가 당선작이다.
당선작 외에도 '성락원' 등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 4편을 박씨는 예전과 달리 즐겁게 썼다고 한다. "그동안 시를 쓸 때는 내 상처를 남에게 감춘 채로 화려하게 꾸며 쓰려고 했다. 쓸 때도 고통스럽고, 혼자밖에 읽을 수 없는 시를 썼달까. 이번 투고작들을 쓰면서는 시를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도 읽고 얘기 나눌 수 있는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드디어 시의 뮤즈가 찾아온 것을 한국일보 신춘문예가 제대로 간파한 모양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 심사평
예심 없이 모든 투고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숙독과 합평으로 심사가 진행됐다. 시국 탓인지 꽤 많은 작품에서 유행처럼 죽음을 서슴없이 다루는 것이 우려스러웠다. 또한 빈번한 외래어의 사용과 심지어 영어를 그대로 시에 사용하는 것은 21세기 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죽음보다는 희망을 가진 작품에 기대를 걸며 '가족의 탄생'(팽샛별), '감독의자'(지석현), '새는 없다'(박송이)를 최종심에 올렸다. '가족의 탄생'은 영화를 보듯 선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눈에 시를 들어오게 하는 힘이 좋았다. 하지만 당선작이 되기에는 시가 가지고 있는 강한 산문성이 문제였다. 그런 산문성이 시가 가지는 독특한 맛을 잃게 해 아쉬웠다. 앞으로 가벼워지는 것에 대해 노력해주길 부탁한다.
'감독의자'는 신선한 소재의 참신한 작품이었다. 산문시였으나 시의 흐름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투고한 다른 작품이 그와 같은 무게를 보여주지 못했다. 앞에서 밝혔듯이 모국어로 쓰는 시에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한다.
'새는 없다'는 새의 존재와 상징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였다. 다른 시들에 비해 긴 길이의 시인데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감에 좋은 점수를 얻었다. 투고자들이 흔히 가진 애매모호함을 극복하는 선명성도 좋았다. 하지만 감동으로 가기에는 힘의 결락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새는 없다'는 좋은 작품이라는 것보다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 대성을 바란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투고자들에게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
● 심사위원= 신경림(시인) 정호승(시인) 정일근(시인ㆍ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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