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도시를 원하는가, 세계의 도시는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가.
한국일보는 ‘도시디자인과 재생’을 화두로 세계 도시들의 다양한 시도와 성취를 현장에서 심층 취재한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시리즈를 8개월에 걸쳐 연재했다. 한국의 도시들이 건설과 기능, 효율 중심의 하드시티(hard city)에서 사람과 자연, 문화가 중심이 되는 소프트시티(soft city)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시리즈의 취지였다.
연재를 마치면서 건축, 도시, 디자인 분야 전문가 5명의 좌담을 마련했다. 강동진(46)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김승회(47) 서울대 건축과 교수, 박신의(53)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서울시 디자인총괄본부 과장을 지낸 윤혁경(57) 에이앤유디자인그룹 도시디자인 부문 대표, 홍의택(43) 경원대 퍼블릭디자인혁신센터장(이상 가나다 순)이 한국일보사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참석자들은 이 기획의 의미, 우리 도시디자인의 성과와 문제점,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해 심도있는 대화를 나눴다.
_ 세계 도시들의 변화 양상에서 어떤 지점을 눈여겨봤는가.
▦윤혁경= 압축성장으로 인해 우리는 그간 경제와 건축구조물이 주인공인 도시에서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사람을 생각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이번 시리즈에 소개된 도시들에서도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이 읽혔다.
▦김승회= 오스트리아 린츠는 지난해 유럽문화수도 행사 때 나치의 거점 도시였다는 부끄러운 과거를 핵심 테마로 삼았다. 비록 아픔이라 할지라도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역사의 흔적을 건져 올려 반성하고, 또 문화공간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소프트시티란 이처럼 역사와 삶 속에서 사람들이 절박하게 느끼는 데서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박신의= 도시 발전의 패러다임 변화 과정에서 문화예술시설이나 예술가들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력이 새로운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시리즈에서 소개한, 예술이 자연스레 삶에 녹아들면서 도시의 새로운 가치와 경쟁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례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강동진= 도시공학자의 입장에서 소프트웨어적 발상을 담는 그릇이 되는 과거 산업유산들의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황폐화된 산업유산들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해외의 사례들이 이 시리즈에 많이 소개됐고, 우리도 비슷한 시도를 시작하고 있는 단계다.
_ 해외 취재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사회적 합의, 즉 지역의 주민참여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관 주도로 각종 사업이 진행되는 우리 현실에서 진정한 주민참여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윤= 31년간 서울시 공무원으로 각종 도시 사업에 참여했지만, 주민참여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간은 속도가 더 중요했기에 시간이 걸리는 일들은 생략해왔다. 물론 아직도 도시 만들기의 주체는 행정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주민들의 의견을 수용하겠다는 인식이 자리잡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북촌 가꾸기’ 사업의 경우 지역 토박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단 주민들이 대화나 논의를 통해 합의점을 이끌어내본 경험이 거의 없는 우리 현실에서는 주민 중에도 리더가 있어야 한다. 또 리더는 여러 명이어야 한다. 간판 정비로 주목받은 건국대 앞 노유거리 사업은 상인들의 지속적 참여로 초기에 큰 성과를 거뒀지만, 주도하던 이가 떠나니까 전체 사업이 깨져버리더라.
▦홍의택= 학비를 지불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유럽에서도 100년, 200년 넘게 고민하며 만들어온 과정인데 순식간에 이식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한국형 프로세스는 무엇일까 생각해봤는데, 우리 스타일에는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똑똑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주도하는 탑다운(Top down) 방식이 맞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훌륭한 오피니언 리더와 전문가를 키우는 데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하고, 프로젝트 관련자들이 현실을 정확히 알고 제대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박= 그런데 리더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에 소개된 마르세유의 문화공간 ‘프리쉬라벨드메’의 경우 지역 주민과 예술가들이 알아서 키워놓은 후 행정이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행정이 도시재생 사업을 주도하고, 더구나 매사를 단기간에 해내야 한다는 내적 욕구가 있는 우리 사회에서 리더, 지역 주민, 예술가 이런 식의 도식화된 메뉴판을 만들어놓고 일을 진행한다면 과연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_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주민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강= 창조도시, 도시재생 같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정작 주민참여를 위해 필요한 직업군, 즉 주민과 행정 사이에서 링크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다. 우리 교육시스템이나 커리큘럼으로는 그런 기회를 만들기 어렵다. 사회복지와 공학을 결합시키는 식의 통합적 교육이 필요하다.
▦홍= 영국이나 미국 등의 재생 사업을 보면 한국 사회에는 없는 모듈이 있다. 바로 프로젝트 파이낸싱, 즉 투자 컨설팅을 하는 회사와 인력이다.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뉴욕 편이 ‘하이라인 프로젝트’의 설계 책임자로 소개한 황나현씨가 대표적 사례다. 한국 사회의 경우 정부의 의지도 있고 전문가들도 적지 않은데 도시 만들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의 프로젝트를 주도해 실현시키고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관리까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 예술대학과 경제대학, 공과대학을 하나로 합친 핀란드의 알토대학처럼 우리에게도 도시계획, 건축, 문화경영, 디자인 등 각 분야별 자원이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
▦김= 주민과 행정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지만 근본적으로 도시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과연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머물러 살아야 그 공간의 가치를 염려하고 따지고 참여하는데, 지금의 서울은 끊임없이 사람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사회라는 점이 안타깝다.
_ 도시재생에서 행정적 지원이 결과적으로 지역의 상업화를 초래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지.
▦박= 서울은 땅값이 너무 비싸서 행정의 개입 없이는 도시재생 사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행정이 어떻게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해야 한다. 문래동 철공소 거리에 자생적으로 생긴 창작촌도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서울시는 창작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설을 더해서 문래동을 시 행정의 성과로 편입시키려 하는데, 정말 행정이 해야 할 일은 예술가들이 쫓겨나지 않게 지켜주는 것이다. 작지만 매력적인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 내부에서 창작과 제작, 향유, 보급, 재투자가 이뤄지는 선순환 경제구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인위적으로 공간을 만들어 예술가를 공모해 입주시키고, 작품 생산이나 지역 주민 교육을 강요하는 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윤= 북촌도 문제가 많다. 서울시가 한옥의 개ㆍ보수를 지원했더니 집값이 올라버렸고, 이제는 거주공간이 아닌 부유층의 별장이나 유흥공간이 돼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북촌이 상업화되지 않았다면 한옥은 보존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경제발전의 논리가 우선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한테 맞는 옷을 입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홍= 우리 정부는 시범 사업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시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역할은 유도하는 것이다. 사회적 담론이 스스로 형성이 되도록 계속 밑밥을 던지면서 기다릴 줄 아는 기술이 필요하다.
▦윤= 공무원들은 성과주의다. 과정이 아닌 결과에 대한 평가만 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일은 안 하려고 한다. 예산도 설계하고 공사하는 비용만 나오지, 주민들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위한 예산은 없다. 도시행정을 주도하는 공무원들 중 디자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도 안타깝다.
_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선정된 서울시의 디자인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김= 너무 서두른다, 그리고 과소비가 있다는 생각이다. 2004년 서울시 도시디자인 기본계획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적게 하지만 잘 만들어서 유지 관리를 잘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실행되면서는 많이 만들고 보여주는 쪽으로 돼버렸다.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를 보는 것 같다.
▦강= 도시디자인은 겉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길이나 여러가지 조직, 건축 이런 것들을 맥락에 맞게 조화시켜가며 해야 하는 일인데 어느 순간 장식적인 쪽으로 가버렸다. 서울이 그러니까 지방에서도 다들 따라 하는 것 같다.
▦박=어떻게 하면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지역의 움직임들을 소중하게 유지시켜 줄 수 있느냐는 쪽에 관심을 둬야 한다고 본다. 도시와 공간을 바라보는 젊은 사람들의 가치관은 바뀌었는데, 행정이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홍= 순기능도 평가해야 한다. 디자인적 관점에서 볼 때 벤치나 가로등, 표지판 같은 거리 시설물의 경우 불과 5년 사이에 확연히 발전했다. 과거에는 디자인에 대한 의식조차 없는 영세업자들이 거리의 얼굴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제작자들의 자세나 기술이 모두 달라졌고, 괜찮은 회사도 생기고 일자리도 창출됐다.
_ 우리의 도시디자인이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강= 남의 좋은 점을 따라가는 것도 좋지만 먼저 우리가 지켜야 하고 또 활용할 수 있는 도시 자산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일본의 도시재생센터는 조사 작업에도 지원금을 주는데, 우리는 그런 과정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재생을 통해 미래를 열어가려고 한다면 각 도시들이 획일화되지 않기 위한 장기적인 조치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부산시는 한국전쟁 때 형성된 고지대 골목길인 산복도로를 새롭게 살리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실 투자 가치가 없는 지역이라 재개발이 안되는 바람에 시작된 일이긴 하지만, 한국전쟁과 관련된 부산의 자산을 다시 바라보는 기회가 됐다. 서툴기는 하지만 우리 도시들이 앞으로 가고는 있다고 생각한다.
▦홍= 문명을 들여오는 것은 쉬워도 문화를 들여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를 불러들여 화려한 건물들을 지어놓긴 했지만 과연 우리가 그것들을 누릴 준비가 되어있었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문화를 수입하는 것에도 좀 더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벤치마킹을 하러 해외 답사를 간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3박4일간 10개 도시를 돌며 건물 모양만을 보고 오는데, 사실 그 이면에 담긴 훨씬 많은 이야기들을 보고 듣고 와야 하는 것이다.
▦김= 도시디자인은 도시를 삶의 생태계로서 이해하고 진화시키고자 하는 철학이 핵심인데 한국에서의 도시디자인은 그냥 좋은 시설물을 만드는 것이 돼버렸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부분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 삶이 어떻게 나아졌느냐 하는 데 대한 성찰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와 같은 의미있는 기획이 지속적으로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터전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진행ㆍ정리= 김지원기자 eddie@hk.co.kr
■ 16개국 29개 도시 발로 뛰어 심층 취재
한국일보는 창간 56주년 기획으로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를 지난 5월 27일부터 8개월에 걸쳐 매주 목요일자에 연재했다. 프랑스의 마르세유부터 쿠바의 아바나까지,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기 위한 16개국 29개 도시의 치열한 노력을 12명의 문화부 기자들이 직접 발로 뛰며 심층 취재한 대장정이었다.
뉴욕, 런던, 파리 등 대도시부터 독일 튀빙겐이나 네덜란드 드라흐텐, 스웨덴 함마르비처럼 낯설고 작은 도시까지 망라한 29개 취재 대상 도시의 리스트는 학계와 도시ㆍ건축ㆍ디자인 분야 전문가, 건축ㆍ예술전문지 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선정했다. 특히 도시의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민과 자치단체, 예술가, 기업 등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주체들이 긴밀한 소통과 파트너십을 통해 일궈낸 도시 가꾸기의 성과와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해외 사례뿐 아니라 매 주제와 관련된 국내 도시의 시도와 문제점 등도 함께 소개함으로써 의미를 더했다.
탄광촌에서 예술도시로 탈바꿈한 영국 게이츠헤드에서는 건립 5년 전부터 지역 학교를 대상으로 음악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한 콘서트홀을 만났고, 교통신호등과 차선을 없애버린 드라흐텐에서는 도로를 사람을 위한 공유공간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목격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는 도시계획을 통해 지역간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아바나에서는 도시농업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불모의 섬에서 현대미술의 메카로 변신한 일본 나오시마는 기업과 지역의 유기적 결합이 주민들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 기획은 특히 각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애썼다. 헬싱키 시장 유씨 빠유넨, 암스테르담 도시계획부 CEO 한스 테일, 요코하마 도시디자인 업무를 40년 동안 담당한 쿠니요시 나오유키 씨 등 행정가와 도시계획 전문가부터 건축가와 예술가,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의 요리사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생생한 발언이 지면에 등장했다.
연재되는 동안 국내외에서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스위스 취리히 시는 시리즈 게재 내용을 번역해 시 홈페이지에 게재했고, 뉴욕의 도시재생 전문가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의 자료 요청이 잇따랐다. 국내 각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해 건축ㆍ환경 등 관련 단체들로부터 현장 취재 기자들에 대한 기고 및 자료 제공 요청도 쇄도했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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