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은 김연아에게 집중됐다. 대표적인 금맥인 쇼트트랙도 기대만발이었다. 지난 2월 밴쿠버동계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스피드 스케이팅에 주목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메달 기대는 남자부의 이규혁과 이강석, 여자부의 이상화(21) 3명만이 나눠가졌다. 빙상계에서는 이상화를 두고 "동메달만 따도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남자부의 모태범(21)과 이승훈(22)에게 밴쿠버올림픽은 큰 무대 경험을 쌓는 기회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예상 못한 이변의 서막은 이승훈이 열어젖혔다. 2월14일(한국시간)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0m에서 덜컥 은메달을 딴 것. 쇼트트랙 대표선발전에서 탈락해 불과 7개월 전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갈아탄 그였다. '10등만 해도 충격'이라는 전망 속에 이승훈이 단단히 일을 내자 한국체대 '07학번 동기생'인 모태범과 이상화도 마음 속에 자신감을 새겼다.
16일부터 사흘간 모태범은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를 목에 걸었고, '동메달 후보' 이상화도 당당히 금메달을 꽉 깨물었다. 세계 빙상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외신들은 한국선수들의 프로필 등 정보를 확인하려고 닥치는 대로 코칭스태프와 한국취재진을 붙들었다. 16일 남자 500m 금메달을 딴 모태범의 월드컵시리즈 세계랭킹은 14위. 공식 기자회견에서 한 외신기자는 "인터넷을 다 뒤져도 모태범 당신에 대한 얘기가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를 좀 들려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대대로 영예로울 타이틀을 얻은 모태범은 이틀 뒤 주종목인 1,000m에서 은메달을 추가했다.
17일에는 이상화가 500m에 출전, 한국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의 첫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4년 전 토리노대회에서 아쉽게 동메달을 놓쳐 펑펑 울었던 이상화는 금빛으로 돌아온 메달에 다시 한번 목놓아 울었다. 이어 이승훈이 24일 '빙속 강국' 네덜란드 팬들의 기립박수 속에 1만m 금메달을 따면서 한국은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를 휩쓰는 경이로운 수확을 거뒀다. 장ㆍ단거리, 남녀를 가리지 않는 메달 풍작으로 한국은 단숨에 세계가 주목하는 스피드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빙속 삼총사'도 국민영웅으로 대접받았다. 밴쿠버 현지에서부터 각종 행사와 인터뷰에 참석하느라 몸이 모자랐고, 귀국 후에는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게 방송 출연이 잦았다. 이 때문에 주위의 우려도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연예인이 아니고 운동선수다. 운동선수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 지켜봐 달라. '이제 끝이네'라는 소리 안 듣게끔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던 삼총사다.
약속처럼 슬럼프는 없었다. 그들은 나란히 동계아시안게임 출전권을 얻었다. 무대는 내년 1월 말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알마티. 밴쿠버 빙속 삼총사는 또 한번의 거침없는 금메달 세리머니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다.
양준호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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