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집 를 읽으면 불현듯 가고 싶은 나라가 있다. 그리스다. 하루키는 에세이 곳곳에서 그가 서너 달 머물렀던 미코노스 섬의 게으르고 황당한 그리스인에게 대해 애정과 비판을 동시에 쏘아 부었지만 산토리니의 하늘빛 해변가를 기억하는 나는 늘 그리스를 꿈꾼다.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과는 대조적으로 몰락에 몰락을 거듭해 온 나라가 그리스다. 그러나 그리스가 낳은 두 명의 걸출한 세계적인 가수가 있다. 한 명은 나나 무스쿠리이고 또 한 명은 아그네스 발차다.
청춘의 해방구, 경춘선 무궁화호
아그네스 발차는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함께 그야말로 독보적인 메조 소프라노다. 메조 소프라노는 소프라노의 그늘에 가려 애시당초 유명해지기 쉽지 않은 영역, 그러나 빼어난 가창력과 매력적인 중저음은 그녀의 명성을 공고히 하기에 충분했다. 아그네스 발차가 국내에도 유명해진 것은 신경숙의 소설 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책의 서문에 "기차는 8시에 떠나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아니 아니, 그것은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라는 노래에 등장한다. 기차를 타고 전장으로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그린 노래는 아그네스 발차의 매력과 더불어 멜랑콜리한 가사가 조화를 이루며 일약 그녀를 세계인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최근 개봉된 영화 에 등장한 그녀의 노래 'There will be the better days, even for us'도 그녀를 일순간 젊은 세대에게도 유명하게 했다.
10여 년 전에는 비둘기호라는 기차가 있었다. 역이란 역은 모두 멈춰 서는 완행열차. 속도가 매우 느려 간혹 날쌘 청년들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리거나 올라타는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열차는 그 당시 더 고급인 통일호나 새마을호를 만나면 그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역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싼 운임 내고 탄 설움을 톡톡히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느리고 허름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 열차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열차에는 인근 도시 학교로 통학하던 청소년들의 설렘과 재잘거림이 담겨 있었고, 삶은 달걀과 푸성귀를 담은 광주리를 이고 아들 딸 집으로 가던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있었고, 5일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담은 봇짐을 들고 새벽 첫차를 탄 장꾼들이 있었다.
어느 틈에 그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비둘기호 역시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그러던 가운데 통일호마저 몇 년 전 없어졌다. KTX가 나타나면서 이제 무궁화호도 사라지는 추세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은 빠르고 편리한 KTX를 이용한다.
엊그제 경춘선 무궁화호가 사라졌다고 한다. 청춘의 무질서가 허용되었던 이른바 해방구 열차가 사라진 것이다. 경춘선은 여객을 실어 나르기 보다는 청춘을 실어 나르던 열차였다. 기차를 놓치더라도 500마일 밖에서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노랫말과 함께 경춘선 무궁화호는 사라지고 수도권 고속 전철이 대신하게 되었다. 별달리 경춘선에 얽힌 추억거리도 많지 않고 빚진 것도 없는데 경춘선 무궁화호가 사라졌다고 하니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퍼내고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은 것이 젊은 시절의 추억이고 보니 인간은 시시때때로 과거를 떠올리게 되는가 보다.
추억에 오래 머물 순 없어
그러나 생애 최고의 화려한 날들이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금빛 미래를 꿈꿀 수 없다. 추억은 잠시 회고할 수 있는 가장 감미로운 마음의 고향이지만 오래 머물 곳은 더욱 아니다. 과거에 묻혀버린 인간은 미래를 꿈꿀 수 없고, 고향이란 어차피 떠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때문이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보고 길을 찾았던 시대는 행복했다"는 루카치의 말이 생각나는 2010년의 끝이다. 사흘 남은 세모만큼은 사라지는 그 모든 것을 위해 한번쯤 고개를 숙여봐야겠다. 잘 가라, 2010 !
김동률 KDI 연구위원·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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