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영조 4) 4월 3일 소론, 남인들이 무신란을 일으켰다. 경기·충청도의 이인좌(李麟佐), 경남의 정희량(鄭希亮)·조성좌(曺聖佐), 호남의 박필현(朴弼顯), 평안도의 이사성(李思成), 함경도의 권익관(權益寬), 중앙의 남태징(南泰徵) 등이 주동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서남당쟁에서 남인은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庚申換局), 1694년(숙종 20)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완전이 실각하고, 서인이 독주하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다. 그리고 두 당은 신료로서 해서는 안 될 택군(택君)을 했다. 소론이 경종을 지지한데 반해 노론은 연잉군(延仍君)을 지지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경종이 즉위하기는 했으나 4년 만에 죽고 연잉군이 즉위했다. 21대 영조다.
그러나 소론과 남인들은 연잉군이 보내준 개장을 먹고 경종이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조가 노론인 김춘택(金春澤)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영조 김씨설이다. 이에 전국 여러 곳에서 흉서·괘서사건이 일어났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온건 소론인 이광좌·오명항 등이 다시 기용되자 급진 소론인 정희량·박필현·정세윤 등과 남인 이인좌·조성좌 등이 반란을 꾀했다. 이인좌는 안성·양성에서 기병해 1728년 3월 15일에 청주성을 점령하고 죽산·안성으로 진격했다. 그는 군중에게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곡하게 했다.
이 반란은 3월 14일 용인에 은거하고 있던 소론 영상 봉조하 최규서(崔奎瑞)의 고변과 경상감사 황선(黃璿)의 장계에 의해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소론인 병조판서 오명항을 4도순무사로, 소론인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으로 삼아 2,000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소론으로 하여금 소론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게 한 것이다. 오명항은 이인좌군을 토벌한 후 영남·호서로 진격했으나 이미 난은 진압된 뒤였다. 무신란은 17여일 만에 사실상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이 죽고, 천여 명이 귀양갔다. 무신란이 수습된 뒤 오명항은 양무(揚武) 1등공신, 박문수 등 5인은 2등공신, 이보혁 등 15인은 3등공신, 이광좌 등은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그리고 경상우도는 향후 50년간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하는 등 핍박이 심했다. 노론들은 무신란의 사상적 연원을 남명(南冥)·정인홍(鄭仁弘)학통으로 소급해 경상우도 사족을 철저히 탄압했다.
무신란은 노론정권에 대한 소론 ‧ 남인들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런데 이 반란에는 집권당의 착취에 견딜 수 없던 하층민들이 많이 가담했다. 그리하여 무신란이 홍경래란, 진주민란, 임술민란 동학란 등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무신란은 ‘무신사태’ ‘무신의거’ ‘무신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나 과도한 감이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