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인이 운영하는 인도 음식점과 일본인이 주문 받는 돈가스집 같은 곳을 한 달에 3~4번 정도 가요.” 직장인 송현미(26)씨는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바빠진다. 1시간 남짓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려면 특이한 맛집을 찾아야 하기 때문. 식사 후에는 회사 지하의 유명 커피전문점 대신 조금 걸어야 하는 허름한 수제 커피 가게에서 드립커피를 마신다. 그는 “에스닉 푸드(외국의 민속 음식)는 한국에서도 다른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매력을 준다”면서 “이왕 즐길 거라면 남들은 잘 모르는, 독특하고 새로운 선택을 하는 편”이라고 말한다. 회사 근처 찌개집이나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던 과장급 이상 선배들의 눈에는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하다.
21세기 들어 지난 10년 동안 돈으로 살 수 있는 문화의 종류는 더욱 다양해졌고, 대중의 이질적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소비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 시대에 물질의 효용보다 이미지화된 가치에 집중하는 경향도 더욱 심화되고 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소비의 다양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 외식업계를 주도하던 맥도날드. 당시 350여 개에 달하던 점포는 2010년 현재 230여 개로 줄었다. 상징적인 점포도 자취를 감췄다. 3년 전 맥도날드 1호점인 압구정점이 문을 닫았고, 또 다른 패스트푸드 브랜드 파파이스도 비슷한 시기에 종로의 랜드마크였던 매장을 철거했다. 그 사이 트렌드에 민감한 압구정과 홍대 앞 등지에는 베트남, 인도 음식점이 들어섰다. 스페인, 그리스 식당들도 속속 생겨났다.
맥도날드가 표상하는 2000년 이전의 소비문화가 단순하고 획일적인 것이었다면, 태국의 전통 국 요리 ?c얌꿍이 상징하는 뉴밀레니엄의 소비는 개성있고 주체적이다.
먹거리뿐만이 아니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주요 작품들은 수상 전 다수가 국내에 번역 출간돼 있었다. 영미권이 아닌 나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면, 그제서야 급히 번역한 책을 서점에 깔던 풍경은 이제 아련하다. 1990년대 말부터 급격히 성장한 어린이책 시장에서도 공주 시리즈나 명작 동화 대신 이란 그림책이나 베트남 설화 같은, 변방의 것으로 여겨지던 이야기가 호평을 얻고 있다.
소비가 다양화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IMF사태 이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문화가 유입했고, 소비에 대한 패러다임이 전환했다. 권경우 문화사회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2000년 이후 부가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종전 단순히 필요로서의 소비가 나를 보여주는 형태의 소비로 바뀌었다”며 “1990년대 중반 대학에 입학한 세대들이 어학연수와 배낭여행 등으로 세계로의 진출이 많아지면서 다른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풍토를 형성했다”고 분석했다.
이 세대가 실질적인 소비 주체로 떠오르면서 이색 문화 소비량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00년 550만여명이던 한국인 출국자는 2010년 1,046만여명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인터넷에서 모바일까지, 통신기기의 눈부신 발전도 정보 접근성을 높이면서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요구를 불러왔다.
“소비가 나를 말한다” 가치소비의 증가
21세기의 소비자들은 상품의 물리적 속성이나 편익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브랜드, 이미지 등 무형의 가치를 소비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2007)가 이미 40년 전 자신의 저서 에서 “현대사회는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 이미지를 소비한다”고 지적한 데서 더욱 발전한 모습이다. 소비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역할 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이런 변화는 그들을 공략하는 광고에서도 한 눈에 나타난다. 1990년대 한 건설회사의 아파트 광고에는 “일단 튼튼해야지” “실내 환기도 잘 되구”처럼 아파트의 품질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카피가 사용됐다. 당시 아파트 광고는 분양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평형과 분양 문의 같은 자막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2010년의 한 아파트 광고에는 녹고 있는 빙하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북극곰의 모습밖에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을 시작합시다’라는 카피가 아파트의 친환경성을 넌지시 드러내기는 하지만 광고는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가치를 소비하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를테면 ‘우리는 가격이나 시설뿐 아니라 지구의 환경까지 고려한다’는 우월감 같은 것이다.
인디음악의 성장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2000년 델리스파이스로 시작한 국내 인디음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장기하 이후 더욱 증폭되고 있는 추세다. 생명공학박사 출신의 루시드 폴 등 가수의 출신도 다채로워졌고, 이에 따라 음악도 세분화했다. 사람들은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소량 생산하는 희귀한 음반을 손에 넣거나, 흔하지 않은 음악을 듣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나 다변화한 문화계에서 독점의 논리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방송에 대한 모니터링과 시정 노력이 있었는데, 이제는 연예인들로 방송이 뒤덮이는 등 컨텐츠의 독점이 일어나도 반성이 없다”면서 “자본과 컨텐츠의 독점은 문화적 쏠림 현상을 야기하므로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자생적이고 대안적인 문화 시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 "내 품격 높일 명품 사자"
2010년 한국에는 번화가 아니더라도 루이비통 스피디백을 든 여성들이 즐비하다. 80만원을 호가하는 아이폰 사용자는 이미 100만명을 넘어서, 고가품이라는 인식조차 거의 없는 상황이다.
2000년대 소비문화의 변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명품 소비의 일반화다. 남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다른 소비를 줄여서라도 자신의 품격을 높여줄 수 있는 명품을 가지려고 애쓴다. 2007년 미국 포춘 지는 이런 변화를 진단해 ‘맥럭셔리(McLuxury)’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맥도날드(Mcdonald)와 럭셔리(Luxury)를 합성한 신조어다. 이 표현은 여전히 한국 소비문화의 상징이 될 만하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명품 선호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라면서 “지난 30년처럼 인류가 풍요롭게 산 적은 없었다. 이 때문에 중산층 혹은 그 이하 계층까지도 사치를 선망하는 극단적인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상류층이 ‘위버 럭셔리’(명품 중의 명품)를 향해 도망가고, 아래 계층이 이를 따라가는 현상은 계속되는 게임과 같다. 현대사회에서 필요에 의한 합리적 소비는 극히 일부분일 뿐, 대부분의 소비는 자신의 지위를 표현하는 행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움직임은 있다. 뉴욕의 한 저술가가 쇼핑을 끊고 전기까지 차단해버린 채 생활한 ‘노 임팩트 프로젝트’나, 아름다운커피 등 공정무역 상품 소비가 그것이다. 김 교수는 그러나 “자진해서 소비를 줄이고 친환경적 소비를 하려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혜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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