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밤 홍익대 앞 클럽인 '사운드홀릭 시티'. 한 시간 넘게 무대 위에서 격한 음악을 토해내던 보컬 이원석(34)씨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노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200석 정원의 관객석을 채운 채 정신 없이 몸을 흔들던 젊은이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갑자기 왜"라는 어리둥절함이 묻어있다. "데이브레이크가 저런 노래를…"이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날 무대에 오른 데이브레이크는 인디밴드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유명 락 밴드. 광란의 밤을 기대하고 '홍대 클럽'을 찾은 이에게는 실망스런 노래였을 터이다.
하지만 이씨는 락과 동떨어진 노래를 선보인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놀 때 놀더라도 이 추운 날 소외 아동 생각 한 번 합시다. 오늘 하루는 아이들을 위해 보내려 합니다. 이 노래 다 함께 불러요." 그리고 "기왕이면 조그만 도움도 있으면 더 좋겠다"는 말이 뒤따랐다. 관객의 돈만 걷는 게 아니라 밴드 멤버들이 자신의 애장품을 내놓고 관객들이 사는 방식으로 십시일반의 기부가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마니아인 관객들의 주머니에서 지폐들이 쏟아져 나왔다. 30대의 여성 회사원은 보컬 이원석씨의 손목 시계(4년 전 구입가 40만원 상당)를 30만원에 샀고 키보드를 치는 김장원(31)씨의 오토바이 헬멧은 5만원에 팔렸다. 이날 사운드홀릭 시티에서 49만6,000원이 모여 소외 어린이를 위한 기부금으로 사용됐다.
홍대 클럽의 기부천사 변신이 그냥 즉흥적으로 이뤄진 건 아니다. 비영리공익재단인 아름다운가게 내 대학생 공익캠페이너 그룹 아름다운공작단(30명)이 이름 그대로 꾸민 '아름다운 공작' 덕이었다. 공작단 송주호(24ㆍ서강대 경제학과 3년)씨는 "최근 기부단체의 불미스런 일로 나눔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며 "가장 소비적인 공간에서 기부와 기증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 클럽을 돌며 도움을 청했다"고 말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클럽 내에 기부 안내부스를 마련하고 공연 중간에 공연 팀이 "기부를 해달라"는 말만 해주면 되는 일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데이브레이크처럼 선뜻 호응해준 경우는 열에 하나 정도. 송씨는 "원체 클럽과 기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귀찮아 하기도 하고, 불편하다며 문전박대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주 기꺼이 동참하겠다던 한 클럽에서는 공연 시작 두 시간 전 "힘들 것 같다"며 취소통보를 하기도 했다.
물론 공작단이 홍대 클럽만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각종 송년모임도 타깃이다. 지난 23일 강남 신사동 클럽에서 진행된 대학생 파티플래너 연말 파티에서는 21만원의 기부금이 걷혔다. 크리스마스였던 25일에는 세종나눔앙상블(세종문화회관의 일반인 오케스트라) 송년 음악회에서 모자 목도리 등 방한용 기증물품만 300여 점이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유명 그룹 '넥스트'의 기타리스트 김세황(38)씨는 즉석에서 친필로 사인한 기타를 기증했다. 이들 기증품은 추후 경매 행사를 통해 판매될 예정이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공작단은 한층 더 속도를 낼 작정이다. 더 많은 클럽에서, 더 많은 이들이 참가할 수 있게, 더 많은 공연 팀과 밴드를 찾아 다니겠단다. 송씨는 "기부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이라고 말했다. 공작단은 다음달 7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정직한멜로디밴드와 함께 기부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남상욱 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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