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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성탄절의 '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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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성탄절의 '영희'

입력
2010.12.2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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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이면 영희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 영희는 은현리에서 내가 길렀던 암캐였다. 그해 성탄에는 남쪽까지 유례없는 폭설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환호하며 마당에 나왔는데 영희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쏜살같이 달려오는 영희인데 쌓인 눈 위에 발자국도 찍혀있지 않았다.

혹시 싶어 살펴보니 개집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에! 영희가 임신 중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성탄 새벽, 축복받는 날에 영희가 제 새끼들을 낳을 줄은 몰랐다. 어미가 있어 출산법을 가르쳐주었던 것도 아닌데, 주인이 나서 돕는 것도 아닌데 영희는 혼자서 제 새끼들을 낳고 태를 끊고 젖을 물렸다.

영희는 모두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태어나는 새끼 한 마리 한 마리 제 혀로 핥아서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어주고 배내똥까지 핥아주었다. 그건 마치 원석을 깎아 생명이라는 보석을 만드는 것 같았다. 눈도 뜨지 못한 채 태어난 어린 것들을 영희는 오직 제 혀 하나로 한 마리도 실패하지 않고 온전하게 받아내고 젖을 물렸다.

허술한 개집에서 눈바람을 제 몸으로 막으며 새끼들을 제 몸의 온기로 품어주었다. 나는 영희를 통해서 짐승이 가지고 있는 모성도 사람이 가진 모성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영희는 이젠 세상에 없고 성탄절에 태어나 예수님과 생일이 같은 영희 새끼들의 소식도 알 수 없지만 성탄마다 영희는 나를 찾아와 안긴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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