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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9> 아바나 - 녹색으로 이룬 두 번째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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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9> 아바나 - 녹색으로 이룬 두 번째 혁명

입력
2010.12.2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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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가 끝나가는 11월 말의 쿠바 하늘은 수확을 끝낸 사탕수수 지스러기를 태우는 검은 연기로 곳곳에 가파른 선을 긋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다본 첫 풍경이 그랬다. 차를 몰아 아바나 시내로 들어서자 ‘비바 라 레볼루시온!’(혁명 만세!)이라고 새긴 정치 선전판, 사회주의권 특유의 육중한 잿빛 빌딩, 바스라져내릴 것 같은 식민지시대 스페인풍 건물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녹색의 공간이 흩어져 있다. 공원이 아니라 밭이다. 인구 220만 현대 도시의 복판에서 삽과 고무래를 든 농부들이 땀을 흘리는 경작의 풍경을 마주하는 경험은, 말레콘(아바나의 명물인 방파제)을 덮치는 카리브해의 파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뭉클함을 이방인에게 선사한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군이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후 아바나는 오랫동안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체 게바라의 말)들의 마음 속 교두보였는데, 21세기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와 생태혁명을 꿈꾸는 또 다른 리얼리스트들에게 아바나는 다시 하나의 모델로 자리잡고 있다.

“나쁜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을 가지고 온다”

아바나의 도시농업은 외부 환경 변화에 의해 시작됐다.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코메콘(COMECONㆍ공산권 경제협력기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쿠바 경제에 궤멸적 타격을 가했다. 수출액의 80%를 점하던 설탕과 니켈을 팔 곳이 사라졌고,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의 붕괴를 노리고 한층 심한 경제제재를 가했다. 북한과 이란에도 허용하던 의약품과 비료 수출까지 막았다. 당장 먹을 게 없었다. 도시의 굳은 땅에 농작물의 싹을 틔운 것은, 생태적 자각이 아니라 죽음을 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쿠바 인민은 이후 10년의 시간을 ‘엘 페리오도 에스페샬’(El Periodo Especialㆍ비상 시기)이라 부른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과 비슷한 개념이다. 1990년 이전 쿠바의 농업은 기계농업을 통해 사탕수수, 커피 등 환금성 작물을 대량생산해 수출하던 구조였다. 주식인 쌀과 밀은 수입했다. 식량 자급률은 40% 정도. 하루아침에 식량뿐 아니라 원유, 비료, 농약, 기계부품의 수입이 중단되자 아사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쿠바 정부는 1991년 9월 ‘평화시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급박해진 아바나 인민은 도시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화학비료와 농약이 수입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유기농법이었다. 동구권 몰락 이전 쿠바가 수입하던 화학비료와 농약의 양은 각각 연간 100만톤, 2만톤에 이르렀다. 유기농법의 성공을 점친 이는 많지 않았다. 1992년 아바나를 찾은 미국 스탠퍼드대 조사단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험”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정부는 유기농업 정책을 밀어붙였다.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1992년 리우환경회의에 참석해 “모든 과학 지식을 오염이 아닌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동원하자. 생태계에 진 빚을 갚자”고 역설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아바나는 채소를 거의 100% 자급하는 도시가 됐다. 화학 농산물과 육식에 절어 있던 인민의 건강상태도 오히려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아바나시 농업국의 이사벨 루소 밀렛씨는 “올해 들어 10월까지 벌써 9,000톤의 유기농산물을 시의 유치원, 학교, 병원에 공급했다”고 설명했다. 아바나시 농업국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아바나시 인구 중 2만 6,000여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생태농업을 연구하는 기관만 7곳이다.

유기농 야채 생산량의 경우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5년 만에 10배 가까이 증가하는 등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아바나의 도시농업은 2003년 이후부터는 안정세 속에 제자리를 확고하게 하고 있다.(표 참조) 밀렛씨는 “쿠바 속담에, 나쁜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을 가져 온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승리할 때까지!” 녹색혁명의 발걸음

지난달 26일, 아바나 신시가지인 베다도의 플라자 구역 협동농장을 찾아갔다. 플라자 구역은 체 게바라의 얼굴과 그가 볼리비아 혁명 전장으로 떠나며 남긴 ‘아스따 라 빅또리아 시엠쁘레!’(Hasta la victoria siempreㆍ승리할 때까지!)라는 구호가 새겨진 유명한 내무부 건물, 인민무력부 청사, 쿠바공산당 본부 등이 밀집한 핵심부다. 이런 곳에서 홍당무, 양배추, 고추를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바나에서 도시농업이 차지하는 위상을 상징한다. 담뱃잎과 지렁이 배설물을 섞은 친환경 비료를 물에 개던 농부 안또니오 아르띠아가(54)씨는 “지방에서보다 아바나 시내에서 농사를 짓는 게 훨씬 낫다”고 말했다.

알레한드로 아르레치아 아바나 도시계획위원회 책임연구원은 “나대지나 건물이 무너져 생긴 빈 땅은 우선적으로 농업을 위해 쓰인다”며 “현재 1,300헥타르의 땅이 유기농을 원하는 이들에게 임대됐고, 허가를 기다리는 신청이 4,000건 정도 된다”고 말했다. 임대 허가는 3년 단위로 갱신되는데 임대한 땅에서 3년 간 얻은 수익이 개인이 투입한 액수에 못 미칠 경우 정부가 배상을 한다. 임대료는 없고 오히려 정부가 기본급 개념의 월급을 지급한다. 아바나가 이처럼 도시 농업에 힘을 쏟는 것은 그것이 식량 문제뿐 아니라, 실업과 환경 같은 도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지방 출신인 아르띠아가씨도 도시 빈민으로 전락할 뻔했다. 5년째 이곳에서 일하는 그는 한 달에 700~800페소를 번다. 매달 생산량에 따라 수입이 다르지만 길러낸 작물의 70%가량은 팔아서 자기 수입으로 삼을 수 있다. 아바나 시민의 평균 월 수입은 400 페소 정도. 그는 “지방에 살 때는 화학 비료를 써서 감자나 바나나 같은 것을 키웠지만 여기서는 체계적 유기농법 교육을 받은 뒤 농사를 짓는다”며 알바가를 심은 밭이랑을 북돋았다. 이 식물은 허브의 일종으로 독특한 향으로 해충을 막는 효과가 있는 식물이다.

이튿날 차를 몰아 아바나 구 도심에서 동쪽으로 12km 떨어진 알리마르 지역 협동농장으로 향했다. 헤밍웨이가 를 쓴 포구마을 코히마르가 지척인 곳이다. 허름한 농투성이 차림새의 남자에게 말을 붙였는데 알프레도 뚜로(56)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인텔리였다. 1979년 이후 여러 연구소에서 유기 비료를 생산해 온 그는 “이 비료 1kg이면 화학 비료 200kg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며 지렁이를 이용해 만든 비료를 설명했다. 농장의 한쪽엔 곤충을 이용한 바이오 살충제 연구시설도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연구원도 아바나의 병원에서 일하던 의사 출신이다.

토요일이었던 이날 이 농장엔 지역 주민들이 몰려와 농산물을 사갔다. 아바나의 각급 농장에는 판매를 위한 매대가 설치돼 있다. 쿠바는 배급 제도가 유지되는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의 수매제도 같은 시스템은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인 유기농법에 비해 유통구조는 무척 낙후된 셈. 하지만 그 덕에 소규모 다품종 생산을 통한 로컬푸드 시스템이 뿌리내렸다. 농장 매니저는 “11.9헥타르에 147명이 일하는 우리 농장의 생산물로 12만 알리마르 인민의 야채 수요를 충족시킨다”고 말했다. 출렁이는 농산물 가격에 온 나라가 철마다 홍역을 앓는 한국의 ‘선진화된’ 수급 시스템을 곱씹어보게 하는 말이었다.

아바나= 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유기농업의 또 다른 효과들

도시농업이 아바나에 가져온 변화는 먹거리 자급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의 무역 제재 강화 이후 쿠바는 심각한 의약품 부족을 겪게 되는데, 유기농업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허브 재배 기술은 수입 의약품을 대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아바나 곳곳의 농장에서는 차일로, 레몬그라스, 마조람 등 수십 종의 약초를 재배하고 있고 이것의 효과는 임상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또한 수입 비료로 대량 생산되는 축산품 대신 채식 위주의 식습관이 정착되면서, 쿠바인의 기대 수명과 유아 사망률 등은 선진국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아바나 농업국은 “일단 아바나에 오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100%가 무공해 유기농 제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며 “원래 쿠바인들은 비타민 섭취가 부족한 편이었는데, 이제는 다양한 허브로 맛을 낸 야채 요리가 많이 발달했다”고 말했다.

늘어난 농지는 녹색 공간에 대한 인식도 바꿔 공원이나 수변 공간 같은 녹지가 크게 확돼됐다. 아바나 도시계획위원회에 따르면 1998년 시 면적의 2.24%에 불과하던 임목 면적이 2009년 9.28%까지 넓어졌다. 1996년 시작된 도시 녹화 프로젝트는 2,000만 그루 가까운 식목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심의 농장엔 농부뿐 아니라 판매원, 경비 등 다양한 인력도 필요해 일자리 창출에도 도시농업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유상호기자

■ 인터뷰/ 페르난도 푸네 ACTAF 대표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아바나의 선택이 세계인이 주목하는 지속가능한 도시 모델로 정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쿠바 지식인층의 헌신적 연구가 있었다. 농업환경 전문가 페르난도 푸네(사진) 쿠바 농업산림기술협회(ACTAF) 대표도 그 중 한 명이다. 1990년대 초 유기농업그룹(GAO)을 창립한 이래 유기농법을 보급해 온 그는 “유기농업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_ ‘비상 시기’ 이전과 이후의 쿠바 농업은 어떻게 다른가.

“화학농업 시대에 쿠바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비해 3~5배 높은 생산성을 보였다. 특히 축산업이 발달해 하루 12리터 가까운 우유를 생산하는 소를 길렀다.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무너졌고, 처음에는 유기농업의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20년 유기농업을 해온 결과 30~40%는 오히려 화학농업 시대보다 높은 작황을 보일 정도로 발전했다. 감자, 콩, 사탕수수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유기농법으로 재배하고 있다. 1990년 쿠바 전국에서 유기농업 종사자는 20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37만명에 이른다.”

_ 인식 전환이 쉽지 않았을텐데.

“아직도 유기농업의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 ‘유기농업이 더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완전히 뿌리내리기 위해선, 결국 유기농업만으로 모든 인민에게 충분한 농산물을 보급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지난 20년 간 쿠바는 10만명의 유기농 기술자를 양성했고 이들이 머잖아 그것을 가능케 할 것이다.”

_ 아바나의 유기농업이 다른 지방의 유기농업과 다른 점은.

“쿠바 전체 농지 면적 중 아바나 농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0.4%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는 시 면적의 40% 정도로,대도시치고는 굉장히 높은 편이다. 아바나 유기농업은 특히 ‘페르마 컬쳐’로 불리는 생태공동체의 역할도 한다. 먹거리 안전과 환경 개선, 공동체 문화 조성 등 도시 문제 해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_ 유엔 식량농업기구 쿠바 대표부는 ‘그래도 유기농만으로는 안 된다’는 입장인데.

“그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화학 농법을 1940년대부터 계속해 오면서, 왜 세계가 아직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필요한 건 화학 비료와 농약이 아니라 지구의 미래를 향한 뇌와 심장이다.”

유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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